8. 끊어짐
붉은 벽돌로 지어 올린 오래된 건물과 넓은 운동장을 가르며 번쩍거리는 외제차가 달려왔다.
흩날리는 흙먼지보다 조용하게 차 문이 열렸다. 아이들의 시선은 차에서 내리는 여자의 온몸에 박혔다.
무릎까지 오는 까만 정장에 눈부신 푸른 실크 블라우스는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물결쳤고 목과 귀에서 반짝이는 붉은 루비는 햇살과 부딪쳐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아이들은 연신 눈을 깜빡이면서도 계속 그녀의 모습을 좇았다.
교내에 울려 퍼지는 웅성거림이 커져만 갔지만 수빈은 책상 위에 노트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할머니한테 오늘은 좀 어려운 단어일 듯한데 쉽게 알려줄 순 없을까?’
누군가 수빈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빈이 자신을 본 것을 확인하고 나서 반장이라 불리던 아이는 소리를 냈다.
"교장실로 오래."
새초롬하니 말을 건네고 뒤돌아 친구들 무리로 섞여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 교실 크기의 교장실 문 앞에 서서 왼손바닥을 펼쳐 문에 대고 오른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행여나 너무 크게 문을 두드릴지 몰라 왼손의 촉각에 의지하며 노크한 후 나무 문을 밀어 열었다.
교장과 마주한 여성의 실루엣이 보였다. 수빈이 들어온 것을 알면서도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수빈은 그녀가 엄마임을 한 번에 알아봤다.
“이 아이는 장애가 있어서 한국보다는 외국에서 지내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복잡해져서 전학 조치를 받고 나니 어려움이 있습니다. 행정소송을 내는 방법도 있지만 교장 선생님의 추천서가 있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듯싶습니다.”
“수빈이는 성실하고 착한 아이가 맞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야지요.”
“미국 학교에서 수업기록을 원해서 이번 학기까지만 수업받으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교무부장과 상의해서 학기 말에 정원 외 관리로 진행 도와드리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이뤄낸 당당한 표정의 엄마는 그제야 수빈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민 갈 거야. 그때까지는 여기서 지내도록 해.”
수빈과 짧은 일방적인 대화가 끝나고 수빈의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씀드렸던 기부금은 저희 비서가 행정실에 연락해서 곧 처리하겠습니다. 그럼.”
수빈은 엄마의 그림자를 밟으며 복도를 지나 정문까지 걸었다.
자동차에 몸을 실은 수빈의 엄마는 창문을 내려 수빈에게 곁눈질로 들어가라 고개를 살짝 돌렸다.
자동차 창문이 올라가며 수빈이 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낮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수빈이 그토록 듣고 싶지 않던 그 말을...
“지 아빠 닮아서 쓸모없긴.”
어느새 책상 전등의 불빛만 남겨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수빈은 엄마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어려서 뭔가 실수하거나 무슨 잘못인지도 모를 일이 벌어지면 엄마의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이다.
수빈은 책상 서랍을 열어 10대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있는 귀여운 커터 칼을 쥐었다.
왼손에 차고 있던 시곗줄을 풀고 나니 작고 희미한 선들이 수빈을 반겼다.
작은 칼날을 뽑아 선을 하나 더 새겨 그었다.
칼날이 지나간 길 따라 잠시 후 붉은 방울이 하나 둘 맺혀 올라왔다.
용기 없는 자기 모습에 수빈은 그날도 손목을 칼날을 잡고 속으로 쉴 새 없이 흐느끼며 잠들었다.
수빈 대신 빗물이 소리 내어 울어주는 밤이었다.
아침에 부은 눈과 피딱지 붙어있는 손목을 보며 수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주말이라 영숙에게 한글을 가르쳐야 하지만 이 모습으로 나가려니 더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교장의 추천서를 위해 움직이기 싫은 몸을 끌고 빗길을 재촉해 보았다.
“야야... 니 팔에 뭐가 흐르는 거 같은데? 뭐냐... 피 아냐?”
수빈의 왼팔을 잡아채자 교재가 바닥에 흩날렸다.
“뭐여? 피 맞네. 피 맞아.”
잡아 빼려 수빈이 팔목을 돌렸지만, 영숙의 힘을 이기진 못했다.
놓으라고 수빈은 고개를 빠르게 저어댔지만 영숙의 손목에는 더 힘이 가해질 뿐이었다.
붉은 가죽의 시곗줄이 빗물에 닿아 물을 머금고 수빈의 팔목을 졸랐는지 상처에 핏물이 흘르고 있었다.
수빈의 저항에도 영숙은 다친 왼팔의 시계를 풀었고 여러 줄의 낙인 같은 상처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여. 이게 뭐여?”
수빈은 영숙을 노려보았고 영숙도 사납게 수빈을 쏘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