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암호

7. ++++

암호

by stamping ink

수빈은 뜻하지 않은 방심에 여름 감기에 걸렸다.

장맛비에 습한 공기를 떨쳐내려 켜둔 에어컨 냉기를 가볍게 보았다.

작은 숯불의 불씨 같은 미열이 냉기를 맞아 불꽃처럼 일어났다.

짧아진 옷가지들과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열기가 몸속을 맴돌았다.


서러움이 치밀어 올랐지만 여름 감기마저 수빈을 다정히 대해주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괜찮겠지.'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홀로 병원을 찾았다.


작은 시골 동네에 병원이라고는 빛바랜 흰색 타일이 박힌 박 의원뿐이었다.

병원임을 알리는 녹색 십자가도 온전히 빛을 내지 못하고 'ㅜ'모양만 켜져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진료는 하는 모양이었다.

유리문에 달린 제법 커다랗고 둥근 스테인레인 손잡이를 잡았다.

생각보다 무거운 유리문에 놀랐지만 양손으로 힘겹게 밀고 병원 로비에 들어섰다.

어렵게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쳐다볼 뿐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 파란 카디건의 간호사가 보였다.

로비에는 병원의 절차를 알려줄 어떤 사람도 없었기에 간호사에게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작성하세요."

무미건조한 간호사는 접수증이라 적혀있는 누런 갱지를 내밀었다.

차가운 눈빛과 어울리는 간호사의 손가락에 이끌리어 진료 접수증을 빠르게 작성하였다.

접수증을 전달하자마자 수빈은 접수대를 뒷걸음치며 벗어났다.

로비를 둘러보니 '대기'라고 써놓은 공간에 제약사 로고가 박힌 반들반들한 긴 나무의자가 보였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엉거주춤한 자세로 대기석에 반쯤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신경질적인 발걸음의 간호사가 진료실로 오가는 사이에 병원 유리문이 다시 열렸다.


“시부럴. 이놈의 문짝은 왜 이리 무겁고 지랄이야.”

간호사는 로비로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힐끗 본 뒤, 요란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수빈이 긴 나무 대기석에 같이 앉은 사람을 곁눈질로 쳐다보니 학교 청소할머니였다.

아는 척을 해야 할지, 모르는 척하는 게 맞는지 고민의 시간이 흘렀다.


진료실을 몇 번 들락거리고 나서야 간호사는 대기석에 앉은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김영숙 님, 이수빈 님 함께 들어가세요.”

“김! 영! 숙! 님! 이! 수! 빈! 님! 들어가시라니까요.”

간호사의 음성이 더 날카로워졌지만 둘 다 한 치의 미동도 없었다.

짜증 섞인 몸짓의 간호사는 수빈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수빈에게 간호사는 턱을 치켜들며 진료실에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수빈은 허둥대며 일어섰지만 꿈쩍이지 않는 할머니를 향해 간호사는 탄식의 소리를 내었다.


“김영숙 님!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이년이! 불렀어야 들어가지.”

“이름 불렀잖아요.”

“언제? 니 방뎅이만큼 작게 부르면 누가 알아듣겠냐?”

“할머니! 어서 들어가세요. 점점 목소리만 커져서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간호사를 밀치고 할머니는 수빈이 걸어간 걸음을 따라 진료실로 들어섰다.

함께 진료실에 들어서며 그제야 수빈은 할머니에게 쭈뼛이며 목례를 보냈다.

하지만 할머니는 진료실 안 의자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진료실의 낡은 철제 책상에는 오래된 물건이 잡다하게 늘어져있었다.

자개가 박힌 '전문의 박성훈'이라 적힌 검은 명패만이 유일하게 반들거렸다.

의사의 흰머리는 흰색 가운에 흰 바지와 함께 하나처럼 보였고, 그의 앙상한 손가락은 하얀 머리카락의 움직임과 맞춰 조금씩 진동하고 있었다.

수빈은 철제 책상 옆 동그란 회전의자에 앉으라는 간호사의 손짓을 따라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의자에 앉았다.

'보건실이나 갈걸.' 하고 후회하는 찰나 의사는 거칠게 의자를 돌려 자신의 얼굴과 마주했다.


의사는 입을 벌리라는 몸짓을 했다.

"딸깍"

그는 느닷없이 가정에서 '후레쉬'라 불리는 묵직한 빨간 손전등의 전원버튼을 눌러 수빈의 입안을 비추었다.

당혹스러움에 놀라 입을 벌린 채 얼굴을 뒤로 빼려는 수빈의 목을 의사는 바르작거리지 못하게 부여잡았다.

입속을 이리저리 살펴본 뒤, 손부채질 하듯이 옆에 가 있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수빈은 고장 난 로봇처럼 삐그덕거리며 진료용 검은 회전의자를 벗어났다.


곧이어 서 있던 할머니를 향해 앉아보라는 손짓이 이어졌다.

놀란 수빈과는 달리 할머니는 망설임 없이 수빈이 내어준 자리에 털썩 앉았다.

할머니의 불만 가득해 보이는 성난 입이 꿈틀거리기 시작할 찰나 의사는 할머니의 턱을 부여잡았다.

"쉿!"

간결한 동작으로 의사는 할머니를 제압하고는 고개를 돌려 귀속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진료를 마쳤는지 수빈을 쫓아낼 때와 같은 손짓을 보냈다.

벌 받는 아이들처럼 할머니도 수빈 옆에 나란히 섰다.


“둘 다 귀가 안 좋아서 그래. 하나는 귀가 나가서 안 들리고, 하나는 점점 멀어 가는군. 영숙이 너는 저 학생한테 글씨라도 배워둬. 얼마 안 있으면 너도 저 학생처럼 안 들리게 될 거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