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
계단 위의 세상은 좁은 골목의 어두움과는 달리 화려해도 너무 화려한 곳이었다.
"촤락"
반짝이는 유리구슬로 만든 발이 요란하게 흔들리며 사나이가 나타났다.
자신의 휴대폰에 적힌 예약리스트를 확인하더니 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약하신 이수빈 씨?”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무언의 시선이 오갔다.
사나이는 수빈의 왼쪽 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깊은 심호흡을 하며 수빈은 굵은 시곗줄을 풀러 사나이에게 왼팔을 내밀었다.
"아이코."
상처가 드러나자 영숙은 외마디와 함께 이맛살을 찌푸렸다.
영숙과는 다르게 사나이는 무덤덤하니 수빈의 팔을 잡았다.
팔목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사나이가 입을 떼었다.
“디자인이 여기 들어가긴 무리가 있네요. 레터링이면 커버가 가능할 것 같은데...”
수빈은 휴대폰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레터링도 괜찮습니다.’
“여기 뭐 하는 데냐? 시부럴.. 뭐 타는 냄새도 많이 나고... 아주 귀신 것 같은 나올 집이구먼.”
영숙은 참지 못하고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시부럴?”
사나이가 고개를 돌려 읊조렸다.
“아... 그게 내 말버릇이라. 그러니까. 여가 혹시 문신 집? 수빈아. 너 설마 이걸 할라 그러냐? 여자는 몸에 문신 있으면 못써.”
수빈은 자판을 두드려 영숙에게 기계음성을 들려주었다.
‘이걸 지워야 용기가 생길 것 같아요.’
휴대폰과 함께 길고 날카로운 상처를 지닌 팔을 수빈이 내밀었다.
“그렇다고 문신을... 다른 방법은 없냐.”
둘 사이에 성난 몸짓이 오가자 보다 못해 사나이가 나섰다.
“준비가 안 되었으면 나중에 오셔도 됩니다.”
수빈의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대는 모습을 보니 영숙은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 시부럴.. 다시 용기 내서 살겠다는 다짐이라는데 해야지. 그려. 해. 대신 니 맴 속에 있는 미움이랑 아픔도 다 덮어버려야 한다?”
남의 일에는 관심도 없어 보이던 사나이가 책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써 그들에게 다가왔다.
‘cifrar'
“스페인에 있었을 때 들었던 말 중에 시프라(cifrar)라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암호로 쓰다.'라는 뜻입니다. 상처를 암호처럼 써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어떨까요.”
“시부럴?”
영숙의 발음에 표정 없던 사나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쳤다.
"거 하는데 추가혀도 돼요? 나도 하나 얘랑 똑같이 써주시게."
영숙의 말에 사장이 놀라 쳐다보았다.
"내도 맴 속에 묻혀둔 응어리를 덮고 시작하고 싶어. 까짓것 시집오라는 할아버지도 없으니까 이참에 문신해 볼까 혀."
소독과 도안을 그려놓는 준비과정이 끝나자 귀를 찢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검은 먹물 방울들이 상처 위에 덮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