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쁘다 민원
초조하게 기다리던 버스가 다가오고 있다.
정차하지 않고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나는 손을 힘껏 흔들어 버스에 올라탔다.
환영받지 못한 이방인처럼 어색하게 뒷문 가까이의 빈자리에 자리에 앉았다.
달리는 버스의 덜컹거림이 승객들의 꺾이는 고개의 흔들거림과 하품소리와 맞춰 유연한 리듬을 탔다.
그 속에서 어긋한 음처럼 나의 심장만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려 댔다.
밤새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무리해서 잘하려 하지 말고 열심히만 하고 와.'
딸이 보내준 응원 메시지가 버스의 흔들림처럼 불안한 나의 마음을 붙잡아 주었다.
잊고 지내 온, 다시 시작된 첫 출근길이었다.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의 10년.
과거로 돌아가 2002년 월드컵으로 온 세상이 축제로 들떠있는 시기에 아이를 출산했다.
뜨거운 월드컵의 응원 열기보다 딸아이의 출산으로 온 집안은 흥분상태였다.
하지만 출산의 기쁨의 반대편에는 육아의 고민이 다가왔다.
당시만 해도 일반회사에서 출산휴가에 대한 보장 이라던가 갓난아이를 믿고 맡길만한 기관이 많지 않았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맞벌이였기에 나의 수입이 줄어든다는 것은 집안 경제에 타격이었다.
다시 나의 자리를 찾아가려 할 때 도움을 받아야 할 곳이 나에게는 없었다.
무턱대고 어르신들에게 육아를 부탁하기에는 사정상 불가능하였다.
'줄여서 아껴서 살아보자. 소중한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보자.'
그렇게 나는 전업주부라는 자리를 선택했다.
궁할 때마다 '집에서 애 보는 게 돈 버는 것'이라는 말로 위로를 삼았다.
가족을 돌보는 일에 삶의 의미를 두고 살아온 나의 이름은 어느새 '10년 차 전업주부'가 되어 있었다.
전업 주부로써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호기는 금세 바닥을 보였다.
세월이 흘러도 집안 살림을 총괄하는 책임자라는 막중한 업무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반복되는 집안일, 육아, 어르신들의 영전 업무는 365일 퇴근도 휴가도 용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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