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번은 오르내린
처음 제주에 왔을 때 내 집은 6평 자리의 작은 오피스텔이었다. 신축 건물에다 혼자 살기엔 부족함이 없어 나쁘지 않다 늘 생각했지만, 너무나도 불쾌한 층간소음이 딱 1년을 채우고 도망치게 만들었다.
생각해보니 도망이란 표현은 조금 억울하다. 어렸을 때부터 내게 '부=집'과 같아 집에 대한 욕심이 컸다. 그렇기에 내가 감당이 된다면 월세든 전세든 더 큰 집으로 가고 싶었다. 어쩌면 내 선택은 도망보단 더 나은 삶을 향한 전진이라고 봐야겠다.
내게 집을 구하는 조건 중 중요했던 두 가지. 하나는 층간 소음이 없어야 하며, 하나는 원룸보다는 커야 했다.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여러 집을 보았고, 하나가 충족되면 다른 하나가 충족되지 않아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마침 '복층 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다가구 주택이지만, 이상하리만치 층고가 높은 10평 조금 안 되는 집이 말이다.
운명처럼 다가온 이 집을 계약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터무니없이 겉만 보았다. 수도는 잘 나오는지, 보일러는 잘 돌아가는지, 하물며 옵션의 가전제품은 괜찮은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그저 복층이라는 '낭만'에 오롯이 취했다.
눈에 담기는 것은 낭만에 가깝다. 하지만, 산다는 것은 전쟁과도 같았다. 복층을 산다는 건 계단을 무수히 올라야 한다는 뜻과 같았으니까. 어쩔 땐 네 발로 기어 침실이 있는 계단을 올라가기도, 또 어쩔 땐 오르는 게 너무 귀찮아 바닥에 자기도 해야 했다. 또 오래된 집답게 잔고장이 많았다. 에어컨이 안 되기도, 보일러가 안 되기도, 어쩔 땐 이게 왜 되는 거지 라며 의문을 품게 하는 것도 있었다.
지나 보니 모든 게 추억으로 남았다. 이상한 나의 집. 우당탕탕 탈도 많고 즐거움도 많았던 나의 집. 이제는 이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 1월 29일, 조금 더 넓고 깨끗한 집으로 이사를 하니까. 이별에 가까워서일까. 이 집이 그리울 것 같았다. 천 번 넘게 오르내린 가파르고 높은 계단이 생각날 것 같았다.
계단 중간 부분에 걸터앉아 오래된 나의 공간을 바라보았다. 바깥 풍경은 또 얼마나 예쁜지 제주 시내의 주황빛 야경이 별처럼 빛났다. 평소엔 왜 몰랐을까. 미뤘던 걸까. 혹은 일상처럼 느껴져 무뎌진 걸까. 아니면 끝이 나니 소중해진 걸까.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나의 낡은 집이 오늘만큼은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 이유들이 겹쳐 사랑스럽게 빛나는 나의 일상. 그리고 나의 공간. 계단 삼 분의 이 지점에 우두커니 앉아 바라본 소중한 오늘이 있기에 나는 말할 수 있겠다. 나의 낡은 집에게.
고마웠다고. 네 덕에 일 년 동안 또 성장할 수 있었다고. 앞으로 너를 잊지 않겠다고.
2022.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