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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05. 2023

이불

꿈꾸다

오랜만에 이불 빨래를 했다. 연식이 조금 오래된 세탁기에 좋아하는 섬유 유연제를 듬뿍 넣어 베이지색 거대한 그것을 온전히 맡겼다. 두 시간보단 조금 모자란 시간. 세탁기에서 들리는 경쾌한 종료음에 복층 계단을 우당탕 내려와 커다란 빨랫감을 꺼내 탈탈 털어댔다. 건조대 하나를 가득 채우는 이불. 왜인지 그 모습이 좋아 피식 미소를 지어댔다.


기분이 좋을 때면 와인을 마셔

코끝을 스치는 머스크향. 바싹 마른 포근한 이불이 품에 안겼다. 상큼한 향기가 주는 안도감이 좋아서일까. 침대 위에 이불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좋아하는 와인 한 병을 꺼내 들었다. 검은색 테이블에 샤인 머스켓을 늘어놓고, 좋아하는 와인 한 병과 보내는 시간. 은은한 노랫말에 맞춰 한 잔, 두 잔, 세 잔 천천히 잔을 비워댔다. 금세 바닥을 보이는 기다란 와인병. 붉은 바다가 완전히 사라질 때쯤 나는 꿈을 꾸었다. 졸린 눈꺼풀과 함께 폭신한 이불 위에서.



몽유

알게 모르게 피곤함이 쌓였던 탓일까. 널브러진 테이블을 뒤로하고 아홉 시간이 넘는 긴 여행을 떠났다. 붉은 바다 위로 일렁이는 금빛 물결과 보랏빛 하늘이 몽환적으로 일렁이던 꿈속을. 


그곳엔 달콤한 향기가 있었다. 나긋하고도 초원 같은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온전히 따스한 미소가 있었다. 금빛 찬란한 물결은 때로는 위에서, 때로는 아래에서 흘렀다. 안온하고도 평온한 기분. 일정한 호흡과 심장 박동수만이 존재하는 꿈속 여행은 눈물 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깨고 싶지 않다는 자각은 살포시 눈을 뜨게 했다. 꿈에서 깼을 때 남은 건 어둑한 하늘 위로 펼쳐진 도시의 야경과 포근한 이불뿐. 아쉬움이 가득했다. 길었던 시간은 이상하리만치 짧았다. 다시금 꿈꾸고 싶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부단히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금세 밀려오는 슬픔. 나는 잔잔히 남은 따뜻한 감정만큼은 지키고파 이내 생각을 고치기로 했다.


상큼한 향기가 퍼지는 이불속에서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한 일이라고.


2023.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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