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나의 이름
어스름한 새벽녘, 교회를 찾았다. 해가 뜨기 직전 가장 추운 그 시간,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은 아니었으나 왜인지 해냈다는 마음은 기분을 몽글하게 만들었다. 예배당에 앉아 눈을 감고 고요함 속에 주님과 단 둘이 나누는 대화. 나는 기도로 말했다 '주님이 쓰시는 곳에 힘을 다하겠습니다. 결코 당신을 놓지 않겠습니다.'라고.
나의 이름 하람. 태어나자마자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목사님이 지어주신 이 이름은 어린 시절 목을 조여 오는 한 마리의 구렁이와 같았다. 무언가를 실수하거나, 잘못된 일을 하면 나는 나뿐만 아니라 주님을 욕보이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늘 착하게, 반듯하게 자라려 했다. 더 강하게 조여 오는 압박감에 죽어가는지도 모르고.
죽을 지경에 이르니 살고 싶었다. 구렁이를 칼로 갈기갈기 찢고 하늘을 향해 던지며 당신의 이름으로 살지 않겠다며 등을 돌렸다. 내 믿음이 간사해진 건 그때부터인 것 같다. 필요할 때면 도와주는 척이라도 하라고 부르짖다가도 힘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 너무나도 쉽게 버릴 수 있는 것. 가장 멀리 던질 수 있는 것. 그게 내겐 하나님이었고, 예수님이었고,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이었으니까.
'돌아가고 싶다. 그립고 포근한 품으로' 작년부터 이상하리만치 이런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또, 비겁함에서 오늘 감정일까 봐. 이번이 마지막일까 봐. 이미 너무나도 멀어졌단 생각에 평소라면 들지 않을 의심과 불안함이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어쩌면, 나 스스로 땅을 깊게 파고 발을 묻은 뒤 시멘트를 발랐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겠지. 사탄이 주는 마음이라고. 하지만, 나는 내 감정을 종교적 관점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런 말은 공감도 되지 않거니와 직설적으로 말을 내뱉기 좋아하는 당신의 말이 더 사탄 같으니까.
내게 필요한 건 그저 사유의 시간이었다. 이해하고, 또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 그것만이 이 불안함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성경을 붙들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고 있는데, 맞냐고. 이 마음을 의심하지 않아도 괜찮겠냐고. 대답이 늘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용기가 생겼다는 것. 그것이 나를 다시 교회로 이끌었다.
작년의 나는 부단히 노력한 것 같다. 어떻게든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마음을 부둥켜 잡았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보낸 일 년. 참 이상하지. 어느새 나는 눈을 뜨면 주님을 찾는 사람이 되었다.
어스름한 새벽녘이 아침이 되듯.
추웠던 공간이 따뜻함으로 채워지듯.
언젠가 일기를 쓴다면 '딱 한 번' 정도는 내 이름과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 그리고 그 끝에 나와 같은 성장통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응원해주고 싶었다. 무릎이 시큰할 정도로 여전히 성장통을 겪고 있는 나기에 공감하고 있다고, 힘든 거 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의 종교가 무엇이든 믿는다는 건 고귀한 행위니까.
2023.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