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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검증이 사라진 시대에 자기 인식으로 살아남기

by 황준선

정보 과잉? 이제는 정보에게 잠식 당하는 시대

AI는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불과 10년 전에만 해도,

인터넷을 통해 얻은 방대한 양의 정보를 선별하고 정리해서

어떻게 응용하느냐가 지적 능력의 척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질문 하나만 하면 AI가 수천 개의 증거를 단 몇 초 만에 제시한다.


예를 들어 보자.

“커피가 건강에 좋은가?”라고 물어보면,

AI는 “도움이 된다”는 1,000개의 연구 결과와

동시에 “해롭다”는 1,000개의 연구 논문을 보여줄 수 있다.


2020년 기준, PubMed에는 ‘coffee health’라는 키워드로 수천 개의 논문이 등록돼 있으며,

“심혈관계에 긍정적 영향”을 주장하는 논문과

“불면증, 불안 증가” 등을 지적하는 연구가 혼재되어 있다.


진실은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정보가 넘치는 이 시대는 혼돈을 만든다.


이때 필요한 것은 정보를 더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내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가설-증명 시스템의 붕괴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이렇게 작동했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과 관찰을 통해 데이터를 모은 뒤,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한다.


17세기의 과학혁명을 이끈 이른바 ‘가설-검증’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최근 등장한 대형 언어모델(AI)은 이 시스템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ChatGPT나 Claude와 같은 AI는

입력된 질문에 대해 찬성, 반대 양측의 논리를 거의 무한정 만들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원격 근무는 생산성에 더 좋다/나쁘다”와 같은 질문에

AI는 두 관점을 모두 설득력 있게 설명해준다.


‘정보의 양’보다 ‘정보의 사용법’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어떤 주장이라도 AI는 “그럴듯한 증거”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결국 과학적 검증이 아닌

내가 그 결과를 믿느냐 마느냐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진실을 좇기 위한 과학적 방법론이 그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편향의 무한 증폭

나쁘게 해석하면 AI는 사용자에게 편견을 심는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을 지니며,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할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AI는 이러한 편향을 알고리즘적으로 탐지하고,

사용자의 기대에 부합하는 정보를 우선적으로 제공한다

이는 사용자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시스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이에 따라 ‘정보’는 검증의 수단이 아니라 '설득'의 도구가 되고 있다.

예컨대 유튜브, 페이스북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좋아하는 방향의 콘텐츠만을 보여주며,

Echo chamber(메아리 방) 안에 가두는 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이미 다가온 현재를 두고, 옳으니 틀리느니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이미 겪고 있는 걸 붙잡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떠나간 연인을 떠올리며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미 닥친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생존해야할 지를 묻는 것이

더 '인간다운' 일이 될 것이다.

tempImagermi9Qw.heic 출처: unsplash

질문의 본질이 바뀌다

이 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질문의 초점도 바꾸어야 한다.


과거: “이것이 사실인가?”

→ 현재: “나는 왜 이것을 믿고 싶은가?”


과거: “어떤 선택이 옳은가?”

→ 현재: “나는 진정 무엇을 원하는가?”


과거: “객관적 근거는 무엇인가?”

→ 현재: “내 선택의 배경에는 어떤 심리가 있는가?”


이는 하버드대학교 심리학자 로버트 키건(Robert Kegan)이 말한

‘자기 저자(Self-authoring)’ 단계와도 연결된다.


지식 외부에서 기준을 찾던 시대에서,

자율적으로 의미를 구성하고 자신만의 동기를 탐구하는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비즈니스에서의 변화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이 변화는 분명하다.

예전에는 A/B 테스트를 통해 사용자 반응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 결과에 따라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경우,

실험 결과조차 기업의 선입견에 따라 ‘해석’된다.


MIT의 ‘데이터 스토리텔링 연구소’는 하나의 마케팅 실험 결과도

팀마다 서로 다르게 해석하며,

원래 지향하던 전략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즉, 우리가 ‘증거 기반'이라고 믿는 논의도

실제로는 '정당화 기반'인 셈이다.


“우리는 B안을 원하고, 데이터를 사용해 이를 뒷받침하고 싶다.”

이 말은 현실 속 의사결정 구조를 정확히 묘사한다.


‘데이터-드리븐’이라는 멋드러진 용어는

사실 자신도 이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뜻을 숨기고

'원래 이렇게 해온 던 거라서' 라고 차마 하지 못하기 사용하는 포장지일 뿐이다.


자기 인식의 시대

이런 상황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자기 인식’이다.

기술과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

유일한 차별화는 오히려 더 인간답게 생각하는 것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근대 이후 인간의 주체성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생긴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경쟁력은 ‘정보에 대한 접근력’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감정, 가치 기준을 정확히 인식하는 능력’이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왜 그것을 원하는가?

그 욕망을 충족하면 나에게 무엇이 좋은가?

그것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길 기대하는가?

진정한 변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미래의 핵심 역량

이 시대에 요구되는 능력을 다시 생각해보자:

정보 검색? → AI가 훨씬 빠르고 정확하다.

논리적 사고? → AI가 더 정교하고 폭넓은 추론을 수행한다.

객관적 판단? → 모든 것이 다르게 해석 가능한 시대, 객관성은 환상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무엇이 남는가?

자기 성찰과 심리적 통찰이다.


내면의 동기를 파악하고,

스스로를 이해하고,

원하는 삶의 방향을 설계하는 능력이야말로

AI와 구분되는 유일한 인간의 힘이다.

tempImagepssPBo.heic 출처: unsplash

주관성의 힘

우리는 한동안 ‘객관성’의 이름으로 진리를 추구해왔다.

하지만 AI가 모든 경우를 증명할 수 있는 도구가 된 지금,

객관성은 점차 허상으로 바뀌고 있다.


오히려 주관성 (내가 무엇을 믿고, 왜 그것을 원하며, 어떤 이유로 선택하는가)이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다.


“나는 이것을 원한다. 왜냐하면…” 이 문장을 자기 삶 안에서

분명히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AI 시대의 리더가 될 수 있다.


결론: AI 시대, ‘정보를 찾지 말고, 자신을 찾아라’

이제는 데이터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하기보다,

자기 내부에서 방향을 정해야 하는 시대다.


AI는 무엇이든 보여줄 수 있다.

A와 B 중에 더 좋고 옳은 것이 아니라,

A와 B 모두 정답이 된다.


그래서

AI 시대 우리가 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무엇을 원하며, 왜 그것을 원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깊이 있는 대답이 바로, 인간 고유의 기술이자 생존 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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