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만 쏟아내는 건 해결책이 아니다
학부형을 악마로 몰아 분노를 쏟아내는 건,
그것과 관련 없는 제3자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쉬운 결론이다
이 글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교사를 진정으로 위로하기 위한
심리학의 글이다.
누군가를 스토킹한다는 건
상당히 괴롭고 힘든 일이다.
서이초 교사 사건과
해당 학부모는
스토커와 스토킹 피해자와 비슷한 심리를 보인다.
스토킹하는 사람을
정당화하거나 두둔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스토커도 스토킹을 하지 않고
당하는 사람도 스토커를 잘 물리쳤다면
누군가의 죽음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자식이 다쳤다.
나는 자녀를 키워야 할 의무가 있는 부모다.
학교는 내가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다.
나는 납세자이자 부모로서
내가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해당 교사가 남자든, 여자든, 젊든, 나이가 많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자녀가 피해본 것에 대해서
끝까지 추궁하고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내 아이의 다친 손을 볼 때마다 울화가 치민다.
어떻게 해서든 이 상처를 완벽하게 치료하게 만들 것이다.
그걸 그냥 넘어가라는 것은
도저히 견디기 힘든 무책임 그 자체이다.
나는 교육 과정대로
그리고 내가 학생을 사랑하는 대로
수업을 진행했다.
내가 학생을 헤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지만
어쨌든 학생의 손가락이 다쳤다.
내가 수업을 더 꼼꼼하게 관리하지 못한 잘못이다.
나를 자책하게 된다.
그런데 해당 학생의 학부모가 극성으로 나를 몰아붙인다.
치료비를 요구하고
끊임없이 사과를 요구한다.
나도 내가 잘못한 부분은 인정하지만,
이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학교도 누구도 내 편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도 그 학부모는 나에게 전화를 한다.
그때마다 나는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을 만큼
나를 자책한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 사건을 스토커와 스토킹 대상자로 구도를 바꾸어 보자.
스토킹을 당하는 사람의 최악의 상황은
스토킹을 당하는 자신이
이 일을 유발했다고 자책하는 것이다.
교사는 자신이 이 일을 유발했다고
자책하는 마음이 강했기에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이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스토커를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초기에 단호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하지 마", "돌아가", "너랑 대화하고 싶지 않아"
라고 똑 부러지게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을
온건하게 대했을 때
일이 커진다.
교사의 입장에서도
단호하게 대처하거나
교사를 그만둬 버렸으면
적어도 죽음으로 일이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교사는
이미 교육 서비스직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자식을 위한다'라는 한국의 정서를 배경으로 하여
스토킹을 하는 학부형을 뿌리치기도 힘들다.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 피해를 준 것은 죄가 맞다.
다만,
스토커의 심리를 알려주고자 한다.
스토커는 내가 대상으로 찍은 사람을
괴롭힐 마음은 없다.
스토커의 문제는 타인이 아니라,
본인에게 있다.
내가 보는 것을 믿지 않고,
내가 듣는 것을 믿지 않고,
내가 나를 믿지 못할 때,
강박적인 행동을 보이는 유형이 있다.
나 자신을 잃고,
내 감각을 믿지 못하고,
나 자신을 믿지 못할 때,
그것을 반복으로서 끊임없이
확인하려고 발버둥 칠 때
강박은 나타난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투영되었을 때
스토킹이 시작된다.
연인끼리 "잘 자~" 하고 전화를 끊었을 때
그 사람이 진짜 자는지 아닌지는
사실 중요하지가 않다.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자신을 얼마나 믿는지가 중요하다.
물론 연인이 정말 잠들지 않고
바람을 피우러 다녔을 수도 있지만,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은
그걸 용서하거나 헤어지거나 (슬픔을 동반하겠지만)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것을 눈으로 행동으로 확인하고자
스토킹을 한다.
그리고 그 행동을 내 눈으로 보아도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분간하지 못한다.
그걸 지켜보는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 발생한 교사 사건도 같다.
학부형이 집요하게 그 교사에 대해서
물고 늘어지고 괴롭혔던 것은
그 학부형이 자기 스스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교 수업 중
손이 다친 자녀의 사건을
몇 년에 걸쳐서
교사를 시달리게 한 건
교사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붙잡고 늘어져야
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착각이 있는 것이다.
그 착각에 대한 집착은
마치 스토킹하듯
강박적으로 나타났다.
유달리 마음이 여리고 섬세하고
그만큼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 교사는
이 일을 상당한 자책으로 여겼다.
누군가를 악마로 만들어서
이 일에 분노하고 끝나는 것은
이 일을 지켜보는 제3자에게 가장 쉬운 결론이다.
그렇게 해선 안 된다.
만약 교사가
그 일에 대해 심한 자책으로 받아들이는 자신의 심리를 알고
자기 성격 유형에 맞는 대처법을
실행했더라면 젊고 빛나던 교사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학부형이 교사나 학교에 찾아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고,
도저히 해소할 수 없는 나의 마음의 표출이
교사와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건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을 살피는 법을
알려주었다면 상황을 달라졌을 것이다.
세상의 대부분의 문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 문제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이 문제가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누군가를 죽음으로까지 몰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분명 교사가 느끼는 마음을 읽어
죽음도 막을 수 있었고,
해소할 수 없는 마음의 무작위적인 표출 또한
지적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옹호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글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이 글을 썼다 지웠는지 모르겠다.
먼저 세상을 떠난 교사를 위로하며
그리고 원인도 모른 체 마음의 목마름을 바닷물로 채우며
떠돌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