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은 그날 처음으로
학교 앞을 서성였다.
이곳에 올 이유는 없었다.
그는 학생도, 교사도, 학부모도 아니었다.
그저 지후에게서 들은 한 문장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을 뿐이다.
“학교가 제일 위험해요.”
“그리고… 제일 정직한 곳이기도 하죠.”
주상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학교 담장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교문 쪽에서 한 교사가 나왔다.
구부정하지도, 꼿꼿하지도 않은 자세.
누군가를 통제하려는 기색도,
환심을 사려는 태도도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학생 하나하나를
눈으로만 확인하고 있었다.
박세진이었다.
주상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선생님이시죠?”
세진은 고개를 들었다.
낯선 성인 남자.
이 시간에, 이 위치에 서 있는 건
꽤 부자연스러운 장면이었다.
세진은 바로 경계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무슨 용건이시죠?”
주상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 학교가, 많이 달라졌다고 들어서요.”
“잠깐 들어오실래요?”
세진이 먼저 제안했다.
그 역시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이 남자는
밖에 두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감각이 들었다.
한결은
자신이 이 반에서
가장 문제 많은 학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잊고 싶어도 시험지를 받을 때마다
그 느낌은 더 또렷해졌다
시험 시간,
국어 시험지의 첫 장에는 항상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 시험은 당신이 얼마나 틀릴 수 있는지를 보기 위한 것이다.
한결은 그 문장을 읽고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앞자리에 앉은 아이는
문제 옆에 보기 번호를 더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선택지를 늘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만든 문제를
학생이 다시 설계하는 방식이었다.
옆자리 아이는
국어 문제의 주관식 답을
영어로 쓰고 있었다.
혼자서 영어를 주절주절 거리기도 했다.
뒤쪽에서는
누군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시험지를 들고 복도로 나가더니,
잠시 후
음악실에서 꺼내온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감독 교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흐름이야. 지금 생각이 많이 움직이고 있네.”
한결은 자기 시험지를 내려다보았다.
문제는 이랬다.
이 지문이 당신의 삶에 쓸모없다고 느껴지는 이유를 쓰시오.
한결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정직하게 적었다.
'이런 질문에 답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요...'
펜을 내려놓자
불안이 밀려왔다.
쉬는 시간,
아이들은 자기 시험 답을 자랑했다.
“난 보기 다섯 개 더 만들었어.”
“난 답 안 썼어. 모른다는 걸 증명하는 게 중요하잖아.”
“나 오늘 시험 중간에 수학 교과서 찢었는데 쌤이 되게 만족하더라.”
한결은 웃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 모든 행동이 낯설게 느껴졌다.
출제자의 의도와 정답엔 관심도 없는 그 아이들은
뭐랄까... 여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한결은 그 여유가 없었다.
한결은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명확한 이유로.
돈을 벌기 위해서.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서.
부모에게 걱정 끼치지 않기 위해서.
전문직, 대기업, 안 되면 공무원이라도.
그는 그게 부끄러운 욕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는 그 생각 자체가 문제였다.
‘목적이 너무 분명하다.’
‘세속적이다.’
‘질문보다 답을 먼저 정했다.’
한결은
자기가 왜 이렇게
문제투성이 취급을 받는지
알 것 같았다.
그날 종례 후,
한결은 교실에 남았다.
세진은
한결이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선생님.”
한결이 말했다.
“저… 이상한가요?”
“응.”
세진은 즉시 대답했다.
“아주.”
한결은 그 대답에 조금 안심했다.
“다른 애들은요, 시험지에 제멋대로 답 쓰고,
수업 중에 돌아다니고,
악기 연주하고…”
세진은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었다.
“근데 저는…”
한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냥 잘 살고 싶어요.”
세진의 손이 책상 위에서 멈췄다.
“돈도 벌고 싶고,
안정적인 직업도 갖고 싶고,
부모님도 안 힘들게 해드리고 싶고…”
한결은 한숨을 삼켰다.
“그래서 공부하는데, 그게 여기선 제일 문제 같아요.”
교실이 조용해졌다.
세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 아이의 말은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종류의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한결아.”
세진이 말했다.
“너는 모범생이 되고 싶은 거지?”
“네.”
“그럼 어떤 모범생이 되고 싶은데?”
한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쓸모 있는 사람이요.”
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학교에서 제일 모범생은 누구일까?”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 애들은 쓸모없는 질문을 끝까지 붙잡아.”
세진은 말했다.
“쓸모없다는 이유로 버리지 않지.”
그는 한결을 바라보았다.
“너는 너무 빨리 쓸모를 결정하려고 해.”
한결은 그 말이
위로인지,
경고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날, 교무실 문 앞에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주상이었다.
한결도 그 남자를 보았다.
이상하게도 눈이 마주쳤다.
주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동작이 한결에게는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퇴근길, 세진은 주상과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학생들 어땠어요?” 주상이 물었다.
세진은 대답했다.
“질문은 많은데, 방향은 다 다릅니다.”
주상은 그 말을 마음에 담았다.
멀리서 지후의 말이 떠올랐다.
“학교를 봐요.”
“거기가 제일 먼저 드러나는 곳이니까.”
주상은 그 말의 의미를 아직 다 알지는 못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지후는 이미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세진 같은 사람,
한결 같은 아이,
그리고
자신 같은 사람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집에 돌아온 한결은 책상 앞에 앉았다.
문제집을 펼쳤다가 덮었다.
그리고 공책 한 장에 이렇게 적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막살아보고 싶다 난 아직 학생일 뿐인데...
그는 이 답이
이 학교에서 가장 모범적인 대답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