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가 앞뒤로 바뀐 세상> 회복과 처벌

by 황준선

법원 앞 신호등은 오늘도 초록이었다.


사람들은 멈춰 섰고,

빨간불이 켜지자 동시에 건너기 시작했다.


주상은 그 흐름을 따라 걷다가

문득 발끝을 멈췄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 익숙해져야 하는데,

법원 앞에서는 여전히 몸이 한 번 더 경직됐다.


입구라고 적힌 문으로 사람들이 나왔고,

출구라고 적힌 문으로 사람들이 들어갔다.


안내 표지판이 거꾸로인 게 아니라,

사람들의 확신이 거꾸로였다.


경비원은 방문객에게 말했다.


“소지품은 맡기지 마세요.”

“여기선 가져가셔야 합니다.”


주상은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더듬었다가

그 손을 거뒀다.


복도 끝에서 하민이 걸어 나왔다.

정돈된 넥타이, 정돈된 얼굴.

정돈이 너무 완벽해서

그 안에 있는 피로가 더 또렷했다.


“왔네요.”

하민이 말했다.


주상은 고개만 끄덕였다.

하민은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계단 쪽으로 걸었다.


사람이 덜 지나는 곳.

말이 덜 튀는 곳.


“오늘은 작은 사건부터 봅시다.”

하민이 말했다.


“이 세계가 아직 거꾸로 흐르고 있다는 걸

확인하기엔 그게 더 정확해요.”


주상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작은 사건.

간식 하나.


현실이었다면, 그걸로도 사람은 법정에 선다.

그런데 여기서는

법정이 다르게 쓰인다.



[회복 법정]

문 앞에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회복 법정

이 방에서는 죄의 무게를 재지 않습니다. 서로의 무게를 이해합니다.

방 안에는 피고석도, 방청석도 없었다.

둥근 탁자, 따뜻한 물, 종이컵 대신 머그컵.


간식을 훔친 아이가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편의점 점주가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 판사가 있었다.


판사는 망치를 두드리지 않았다.

파일도 두껍지 않았다.

목소리도 낮았다.


“오늘은 처벌을 논하러 온 게 아닙니다.”
판사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와,

어떤 일이 필요해졌는지를 확인하러 왔습니다.”


점주가 먼저 입을 열려 하자

판사는 손바닥을 아주 작게 들어 올렸다.


“억울함부터 시작하지 맙시다.”

“여긴 억울함을 확장하는 방이 아닙니다.”

점주는 입을 다물었다.

억울함을 말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판사는 아이를 바라봤다.

“무엇을 가져갔나요?”


“초콜릿이랑… 우유요.”

아이가 말했다.


“왜요?”

아이는 한참 망설이다가 말했다.


“배고파서요.”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개 끄덕임은 용서가 아니라 기록이었다.

“배고픔이 먼저였군요.”

“그럼 지금 필요한 건

배고픔이 다시 오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점주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판사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당신도 말할 차례입니다.”

판사가 말했다.


“하지만 먼저, 이 아이를 비난하지 말고

당신의 손실을 말해주세요.”


점주는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저도… 장사 빠듯합니다.”

“간식이 몇 개 없어져도

그날은 손에 쥐는 게 줄어들어요.”


판사는 그 문장을 천천히 받아 적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아이의 배고픔이 있었고,

당신의 빠듯함이 있었습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공평하게 들렸다.


판사는 아이에게 물었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당신은 어떻게 할까요?”


아이는 고개를 숙였다.

“모르겠어요.”


판사는 그 대답을 그냥 두었다.

모르겠다는 말은 이 방에서

틀린 답이 아니었다.


대신 판사가 말했다.

“그럼 우리가 준비해야겠네요.”

“아이에게는 식사 연계.”

“가정에는 지원 상담.”

“점주에게는 손실 보전.”

“그리고 아이는, 자신이 가져간 만큼

매장에 도울 수 있는 일을 하세요.”


점주는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처벌이 아니라 도우라고 하니

본능이 한 번 반발하는 얼굴이었다.


판사가 점주를 바라봤다.

“당신은 이 아이를 용서하라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삶이 더 가난해지지 않게 하자는 겁니다.”


점주는 그제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하민은 그 장면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주상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는

간식을 훔친 아이가 법정에 오지만,

법정은 아이를 부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와 어른이

같은 테이블에 앉게 만든다.


죄가 가벼워서가 아니라,

가벼운 죄를 무겁게 만들면

사회가 더 무거워진다는 걸

이 세계는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벌 법정]

다음 방은 공기가 달랐다.


철문.

보안 검색.

방청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

울지 않으려는 얼굴들.


사건명: 3,200억 원대 사기
피해자: 4,000명

판사는 망치를 들고 있었다.

책상 위 파일은 두꺼웠다.

문장 하나하나가 날카롭게 정리돼 있었다.


가해자는 양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눈빛은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이 오히려 오만처럼 보였다.


그는 먼저 입을 열려했다.

사연을 꺼내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판사가 먼저 말했다.

“이 사건은 이유를 듣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결과를 확인하는 사건입니다.”


가해자의 입이 그대로 멈췄다.

판사가 피해자석을 바라봤다.

“피해자 대표.”

“무엇을 잃었습니까.”


한 중년 여성이 일어섰다.

손이 떨렸지만 목소리는 또렷했다.

“평생 모은 돈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잃었습니다.”

“남편이… 그날 밤 이후로

버티지 못했습니다.”


법정이 잠깐 더 조용해졌다.

여기서는 그 침묵이 ‘공감’이 아니라 ‘중량’이었다.


판사는 가해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 결과를 알고 있었습니까.”

“저도… 압박이 있었습니다.”

가해자가 말을 꺼냈다.


“시장 상황이—”

판사가 끊었다.

“질문에만 답하세요.”


가해자는 침을 삼켰다.

“… 알고 있었습니다.”


판사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도 진행했습니까.”

“…네.”

“그럼 동기는 필요 없습니다.”


판사가 말했다.

“선택만 남습니다.”


가해자는 그제야 표정이 바뀌었다.

여기선 사연이 방패가 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말하려 했다.

“저도 피해자입니다.”

“저도 시스템에—”


판사는 고개를 저었다.

“시스템이 사람을 밀어도 누군가는 멈춥니다.”\

“당신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판결은 길지 않았다.


징역.

추징.

자산 동결.

계열사 해체.

경영권 박탈.

공개 사과가 아니라, 공개 기록.


가해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가 기대하던 질문들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

어떤 상처가 있었는지.

누가 몰아붙였는지.

여기서는 그런 이야기를

피해자에게 넘기지 않았다.


피해자의 삶에 얹힌 무게만큼

가해자에게 그대로 돌려보냈다.


주상은 그 장면을 보며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세상이 거꾸로 흐르는데,

정의는 오히려 편안한 얼굴을 하는 것 같았다.


세상이 뒤집어지기 전에는

간식 하나로 사람을 세우고,

큰 사기로는 사람을 놓아준다.


그런데 이 세계는 반대였다.

작은 죄는 더 이상 커지지 않게 막고,

큰 죄는 더 이상 반복되지 않게 잘랐다.


판결이 끝났다.

사람들은 여전히

'입장'이라고 적힌 팻말을 따라 퇴장하고 있었다.



법정을 나와 복도로 나왔을 때,

하민이 넥타이를 한 번 만졌다.


오늘은 정돈이 아니라

버티기였다.


주상이 말했다.

“여긴… 이상하네요.”


하민은 대답 대신

복도 끝을 한 번 봤다.


저쪽 끝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가까이 오지 않는 거리.\

말을 만들지 않는 시선.

지후였다.


그는 주상과 하민을 보다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마치

확인만 끝낸 사람처럼.

하민이 아주 낮게 말했다.

“누군가 이 순서를
원래대로 돌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주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법원에서 목격했던 것들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주상은 질문만 남겼다.

“그 사람은 어디까지 보고 있죠.”


하민이 말했다.

“학교.”

“법원.”

“… 다음은 아마, 병원일 겁니다.”


주상은 법원 밖으로 나왔다.

초록불에 사람들이 멈춰 있었고,

빨간불에 사람들이 건너고 있었다.


주상은 그 흐름에 섞이며 생각했다.

"세상을 다시 뒤집는다면..."

시험 문제의 보기를 직접 만들어가며 시험 자체를 즐기던 아이를,

단칼에 경영진에게 철퇴를 날리던 법원의 판결을,

다시 뒤집는 일이었다.


그럼 지후는

무엇을 뒤집으려는 걸까.


세상 전체인가,

아니면

세상이 붙여놓은 ‘정상’이라는 이름인가.


주상은 속으로

그 질문을 접어 넣었다.


지후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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