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앞 신호등도
여전히 거꾸로였다.
초록불에 사람들은 멈춰 있었고,
빨간불이 켜지자
누군가는 한숨을 쉬며 건넜다.
주상은 병원 현관 앞에서 잠깐 멈췄다.
여기까지 오기 전,
지후의 말이 떠올랐다.
“다음은 병원일 거예요.”
그 말이 예언처럼 들린 건
그가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다음’을 맞추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가 뒤집혔고,
법원이 그다음이었다면,
병원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이유’의 장소였으니까.
접수대
접수대 앞에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진료는 의사가 환자를 선택합니다
오늘의 진료 가능 인원: 6명
1인당 진료 시간: 최소 30분
처방은 ‘마지막 선택’입니다
약을 원하실 경우, 별도 기관을 이용해 주세요
주상은 안내문을 한 번 더 읽었다.
여기서 ‘별도 기관’은
약을 쉽게 주는 곳을 의미했다.
그곳은 대개 사람들로 붐볐고,
이 병원은 늘 조용했다.
대기실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신
눈이 많았다.
눈 밑이 꺼진 사람,
손끝이 떨리는 사람,
허리를 펴지 못하는 사람.
그들은
아프다는 말 대신
자기 상태를 설명할 단어를 찾는 얼굴이었다.
의사의 급여
주상은 복도 벽면에 붙은 내부 공지를 보았다.
진료 시간 초과: 권장
환자 상담 30분 미만: 개선 권고
연간 성과 평가 항목
처방 감소율
환자 질문 유도율
재방문 감소율(자립 성공 지표)
의사 평균 급여: 공공 교통직 평균 이하
이 세계에서
의사는 ‘사람을 빨리 돌려보내는 직업’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을 오래 붙잡는 직업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소모되는 직업이었다.
“환자를 고르는” 진료실
진료실 문이 열렸다.
의사가 나왔다.
흰색이 아닌 검정색 가운을 걸친 의사였다.
그는 진료 대기실을 한 번 훑었다.
누구에게도 “다음 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잠깐씩 오래 보았다.
그리고 한 사람을 불렀다.
“감기 증상으로 오신 분.”
“들어오세요.”
주상은 그 장면을 보며
이상하게도 숨을 늦게 내쉬었다.
여기선 아픈 사람이 의사를 선택하지 않는다.
의사가
‘지금 이 사람에게 시간을 쓸지’
선택한다.
그 선택이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여기엔 ‘빠른 해소’라는 환상이 없기 때문이었다.
진료
주상은 병원 복도 끝 작은 상담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환자가 아니었다.
문이 열리자
아까 대기실을 훑던 의사가 들어왔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의사가 물었다.
주상은 잠깐 멈췄다가 대답했다.
“아픈 건… 아니고요.”
“그냥…”
“여기가 어떤 곳인지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의사는 놀라지 않았다.
이 병원에선
그런 방문도
‘증상’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앉으세요.”
의사가 말했다.
“보고 싶으시면, 한 사람을 같이 보면 됩니다.”
그는 서류를 펼쳤다.
“감기 환자.”
의사가 말했다.
주상은 의사가 처방전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눈은
본능적으로 책상 위 펜 끝을 따라갔다.
의사는 펜을 들지 않았다.
약을 말리는 의사
의사가 말했다.
“감기약을 원하셨죠.”
환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는 쉬었고,
눈은 빨갰다.
“회사 가야 해서요.”
환자가 말했다.
“오늘은… 무조건 나아야 합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던졌다.
“회사 가야 하는 이유를 말해보세요.”
환자는 잠깐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당황이 섞인 숨이었다.
“그냥… 가야죠.”
“그냥이라는 말은 대개 거짓말입니다.”
의사가 말했다.
“누구에게 거짓말을 하는지는 그다음에 알 수 있고요.”
환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의사는 말했다.
“감기라는 현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감기에 걸릴 만큼 손을 못 씻었는지.”
“왜 면역이 떨어질 만큼 몸을 방치했는지.”
“왜 그 방치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는지.”
주상은 그 말을 듣고
문득 한결의 얼굴이 떠올랐다.
‘틀리면 안 될 것 같아요.’
라고 말하는 모습.
몸이 아픈데도
멈추면 안 될 것 같은 세계.
의사는 환자에게 물었다.
“바빴습니까?”
환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번째 질문.”
의사가 말했다.
“정말 바빴습니까,
아니면
별일 아닌 걸
조급하게 인식했습니까.”
환자가 대답하지 못했다.
의사는 계속했다.
“감기는 시간이 지나면 낫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낫는 걸
약으로 억지로 눌러버리면
당신은 ‘왜’가 아니라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지’만 배우게 됩니다.”
환자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약을 먹으면…”
그가 말했다.
“좀 덜 아프잖아요.”
의사는 그 말에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약은 증상을 완화시킵니다.”
“하지만 증상을 완화시키는 게 언제나 치료는 아닙니다.”
환자는 조용해졌다.
의사는 덧붙였다.
약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외과적 수술.”
“뼈가 부러지는 물리적 충격.”
“출혈.”
“세균 감염처럼 몸이 스스로 처리하기 힘든 것들.”
의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아픔’은 다릅니다.”
“아픔은 대개 삶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신호를 꺼버리면 당신은 다음에 더 큰 신호를 받게 됩니다.”
환자의 손이
무릎 위에서 움찔했다.
“그러면…”
환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의사는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말했다.
“오늘은 약을 줄게요.”
환자의 눈이 커졌다.
"대신, 아주 적게.”
“그리고 약보다 먼저,
당신의 오늘을 바꿀 겁니다.”
주상은
그 문장을 듣고
몸이 잠깐 굳었다.
‘오늘을 바꿀 겁니다.’
이 병원은
몸이 아닌 무언가 다른 곳을 고치는 곳이었다.
처방 대신 계획
의사는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처방전이 아니라
질문지였다.
오늘 당신이 ‘무조건’이라고 말한 것 3가지
그 ‘무조건’이 없으면 실제로 생기는 일 3가지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손실 1가지
최근 2주 동안 쉬지 못한 이유
그리고 이런 현상이 얼마나 자주 반복 되는지
환자는 종이를 받아 들고 한참 바라봤다.
“이걸… 왜 써야 하죠?”
의사는 말했다.
"감기 때문이 아닙니다.”
“감기 이전에
당신을 아프게 만든 방식 찾기 위함입니다.”
환자는
종이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저, 제가 왜 이렇게 바쁜지 모르겠어요.”
의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잘 오셨네요.”
병원 밖
진료가 끝난 뒤
주상은 복도로 나왔다.
시계는
벌써 40분을 넘겨 있었다.
한 사람에게
40분을 쓰는 곳.
빠르게 처방하고
돌려보내는 게 아니라,
‘왜’의 시간을 회복시키는 곳.
주상은
이 병원이
왜 조용한지 알 것 같았다.
여긴 속도를 팔지 않는다.
여긴 빠르게 괜찮아지는 기분을 처방하지 않는다.
여긴 불안을 결제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이 생긴 이유를 앉혀놓고 묻게 한다.
세상이 거꾸로 흘러 온갖 규칙들이 뒤죽박죽이었지만,
주상은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이 세상에 점점 익숙해진 탓일까?
아니면 원래 있던 세상이 더 거꾸로였을까.
병원 출입구 앞에서
주상은
멀리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지후였다.
지후는 여전히
가까이 오지 않았다.
말도 걸지 않았다.
그냥
주상이 이곳을 보았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있었다.
주상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질문을 하나 접었다.
약을 덜 쓰는 병원에서
사람들은 왜 더 안심하는 걸까.
멀리서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방전을 두고 약사와 환자가 다투고 있었다.
자신은 약 판매원이 아니라며,
처방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약은
판매할 수 없다고 말했다.
처방전은 또 다른 의사의 소견일 뿐,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따져 말하고 있었다.
주상이 자세히 다가가보니,
두 사람 모두 검은 가운을 입고 있었다.
약사와 의사였다.
"아 그래... 흰 가운이 아니라 검은 가운이겠지"
병원 앞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천천히 길을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