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인연>,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 대하여

연휴에 만났다가 다시 흩어진 사람들에게 건네는 한 문장

by 황준선

연휴가 끝나고 하루가 지났다. 명절에 만났던 사람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가족은 각자의 도시로, 친구는 각자의 일상으로. 카톡 단체방만 조용히 남아 있다. 오늘은 한 편의 수필에서 평생을 꺼내 쓴 한 문장으로, 만남과 헤어짐 사이의 거리를 이야기한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의 자취

이 문장은 어떤 사람의 어떤 기억에서 왔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특이한 이름으로만 언뜻 기억할 뿐

이번 연재를 준비하며 처음 탐구해 보았다.


피천득, 1910년 서울 종로 청진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신각 근처에서 양장점을 운영하는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서화와 거문고에 능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일곱 살에 아버지를,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도 나는 모성애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열일곱 살 무렵, 그는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한 일본인 가정에 하숙했다. 그 집에는 아사코라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피천득의 책상 위에는 화병에 꽂힌 스위트피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소녀가 갖다 놓은 것이었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십삼사 년 뒤, 스물두어 살이 된 아사코를 다시 만났다. 목련이 피던 봄이었다.

반가운 인사를 나눴지만, 예전에 함께 걸었던 학교 앞 길을 다시 걸으며 신발장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사코는 그 질문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또 십여 년 뒤, 세 번째 만남. 아사코는 미국에서 일본계 2세 남성과 결혼해 살고 있었다. 아직 서른 대의 젊은 나이였지만, 피천득의 눈에 비친 아사코는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피천득이 상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둘은 절을 몇 번씩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고 팔십이 넘은 나이에, 그는 이 세 번의 만남을 한 편의 수필로 적었다.

제목은 <인연>이었다.

이 수필집 실린 이 글은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읽어본 글이 되었다.


피천득은 평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재미있는 건, 제자인 석경징 서울대 교수가 밝힌 일화다. <인연>은 사실 수필이 아니라 소설에 가깝다고 했다. 아사코의 이름도 가명이었다. 그러나 피천득은 그 말에 그냥 웃어넘겼다고 한다.


사실인지 허구인지, 사실인데 허구라도 이야기하고 싶었든지,

이 글이 건드리는 감정은 같다.

만남은 짧고, 그리움은 길다.


연휴가 끝나면 찾아오는 특별한 종류의 그리움

연휴에 사람을 만난다. 평소에는 전화도 잘 안 하던 가족, 1년에 한두 번 보는 친척, 오래된 친구. 짧게는 하루, 길어야 사흘. 그 시간 동안은 같은 공간에 있고,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 돌아감 이후에 오는 감정은, 보통의 그리움과 조금 다르다.

평소에 안 보던 사람을 안 보는 건 익숙한 일이다.

그런데 잠깐 만났다가 다시 안 보게 되면,

그 '안 보는 일'의 무게가 달라진다.


만남이 부재를 환기시킨 것이다.

연휴 전에는 괜찮았는데, 연휴 후에는 문득문득 그 사람이 떠오른다.

같이 먹었던 음식, 같이 웃었던 순간, 헤어질 때 뒷모습.


피천득의 <인연>이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수필은 연인 이야기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의 이야기다.

만남은 세 번.

사이에 십여 년씩의 공백. 그 공백을 채운 건 그리움이었다.

그리움과 공백을 떠올려보며 생성해 본 그림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 말의 무게

이 문장에서 가장 무거운 단어는 '그리워하는데도'와 '아니 만나고'다.

그리워하면 만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리운 사람을 만나지 않는 이유는 바쁘기 때문만이 아니다.

어떤 만남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가기 어렵다.


관계가 변했거나, 거리가 멀어졌거나, 만나면 오히려 기억이 흐려질까 봐.

마치 피천득이 세 번째 만남 후 느낀 것처럼.


연휴에 만난 사람들도 비슷하다.

부모님의 얼굴이 작년보다 조금 더 늙어 있었다는 것,

오래된 친구와 나눈 이야기가 예전만큼 깊지 않았다는 것,

조카가 갑자기 훌쩍 커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만남 안에 이미 변화가 들어 있다.


그래서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 말이 아프다.

잊지 못하는 것과 만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잊지 못하면서도 만나지 않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인연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일 수 있다.


인연이라는 말이 위로가 되는 순간

피천득이 선택한 단어는 '사랑'이 아니라 '인연'이었다.

사랑은 의지의 단어다.

만나겠다, 지키겠다, 함께하겠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인연은 다르다.

인연은 이미 일어난 일에 붙이는 이름이다.

만났으니까 인연이고, 헤어졌어도 인연이다.

만남의 결과가 아니라 만남 자체가 인연이다.


이 구분이 연휴 이후의 그리움에 위로가 된다.

명절에 만난 사람들과의 시간이 짧았어도,

이야기가 깊지 않았어도,

헤어질 때 제대로 인사하지 못했어도

만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의미를 가진다.


피천득은 아사코를 세 번 만났다.

세 번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그 세 번이 한 사람의 일생에 하나의 수필이 되었고,

그 수필이 수십 년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만남의 양이 아니라 만남의 무게가 인연을 만든다.

연휴에 잠깐 스친 대화, 같이 먹은 밥 한 끼, 차를 타고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본 몇 초.

그것들이 쌓여서 한 사람과의 인연이 된다.


수필의 마지막 문장이 가르쳐주는 것

피천득은 <인연>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냈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세 번의 만남과 그리움을 쓴 뒤, 갑자기 풍경 이야기로 끝난다.

이 전환이 피천득 문장의 힘이다.

접속사 없이, 설명 없이, 그리움 뒤에 일상을 놓는다.


수필이 끝나도 삶은 계속되고,

다음 주말에는 또 다른 곳에 갈 것이다.


연휴가 끝나고 그리운 사람이 떠올라도,

삶은 이 문장처럼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그리움을 붙잡지도, 억지로 지우지도 않는다.

그냥 다음 주말의 풍경으로 눈을 돌린다.


그것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일상을 이어가는 방법이다.



다음 편 예고

다음 편에서는 정호승의 <수선화에게>를 읽는다.
연휴가 완전히 끝나고, 혼자인 시간이 길어질 때.
외로움이 올라오는 밤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