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간다고 느껴질 때 읽는 한 문장
하루 쉬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메일함에 긴급한 메일도 없고,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 없어도 되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내가 빠져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간다. 오늘은 방망이 하나를 깎는 데 한나절을 쓴 노인의 이야기를 한다.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으면 되나?"
윤오영, 1907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경기도 양평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창 시절에도 동아일보 학생문예에 시를 발표할 만큼 글에 관심이 많은 소년이었다.
그런데 윤오영은 글을 바로 쓰지 않았다. 양정고보(고등보통학교란 뜻으로 일제강점기 용어)를 졸업한 뒤 보성고보에서 20여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양정고보 3년 후배이자 평생의 벗인 피천득은 그의 독서를 이렇게 기억했다. 밤이면 고전을 읽고, 현대 중국문학에도 관심을 가지며, 동양철학에 정진했다고.
그렇게 50년을 읽은 뒤에야 윤오영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53세가 되던 1959년, <측상락(厠上樂)>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50살이 넘어 시작한 수필이 "필봉에 신이 들었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문단의 화제가 되었다. 방망이를 깎기 전에 50년을 준비한 셈이다.
1974년에 한국수필가협회에서 편찬한 <한국 수필 75인집>에 <방망이 깎던 노인>이 수록되었다. 이 수필은 이후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며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읽은 수필 중 하나가 되었다.
윤오영은 1976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수필 원고와 <방망이 깎던 노인>에 등장하는 실제 방망이는 모교인 양정고등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중년에 접어들면 이 질문이 찾아온다.
회사에서 하루 빠져도 아무 문제없다.
후배가 내 일을 대신해도 결과는 비슷하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이미 제 세계가 있고, 가족은 각자의 일상이 돌아간다.
나라는 사람이 빠져도 모든 것은 작동한다.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이런 변화가 찾아온다.
그런데 이 변화를 한번 인식하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없어도 되는 사람인 것 같다.
방망이 깎던 노인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수필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젊은 시절의 윤오영이 동대문 길가에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에게 방망이 한 벌을 주문한다.
그런데 이 노인이 보통이 아니다.
윤오영이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달라"라고 하자, 노인은 화를 버럭 내며 말한다.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차 시간을 놓쳤다고 하면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결국 체념한 윤오영이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라고 하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으면 되나?"
그리고는 깎던 방망이를 무릎에 놓고 태연하게 곰방대에 담배를 피운다.
재촉하는 세상의 속도와 전혀 다른 시간 속에 사는 사람.
노인에게는 방망이를 사는 사람의 차 시간보다,
방망이 한 자루가 제대로 깎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다.
불쾌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윤오영이 아내에게 방망이를 건넸더니,
아내는 이 방망이 참 예쁘고 좋다고 말한다.
윤오영은 그제야 뉘우친다.
나중에 노인을 다시 찾아가 추어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사과하고 싶었지만,
노인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윤오영은 노인이 앉아 있던 자리에 멍하니 서서 동대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그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방망이를 깎다가 유연히 동대문의 처마 끝에 구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모습.
윤오영은 그것을 "거룩한 모습"이라 적었다.
일을 하면서 구름을 볼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장인이었다.
이 시대는 속도를 존재의 증거로 삼는다.
빨리 처리하고, 빨리 보고하고, 빨리 성과를 내야 존재감이 있다.
그 속도에서 밀려나면 대체 가능한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런데 방망이 깎던 노인은 정반대다.
느리다. 무뚝뚝하다. 손님의 재촉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체 불가능하다.
노인이 깎은 방망이는 다른 곳에서 살 수 없는 것이었다.
대체 불가능함은 빠름에서 오지 않았다.
자기 일을 제대로 하겠다는 태도에서 왔다.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으면 되나?"
이 한 마디를 나의 하루에 대입해 보자.
오늘 내가 한 일 중에, 제대로 한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빨리 끝내려고 대충 한 것은 아닌가.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더라도, 한 가지를 제대로 했다면
그것이 대체 불가능한 사람의 시작이다.
윤오영 자신이 방망이 깎던 노인이었다.
양정고보 시절부터 글에 관심이 있었지만, 바로 쓰지 않았다.
30년을 가르치고, 50년을 읽은 뒤에야 수필을 발표했다.
53세에 시작한 글쓰기가 "필봉에 신이 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빨리 쓰지 않아서 좋은 글이 나온 것이 아니다.
50년 동안 제대로 준비했기 때문에 좋은 글이 나온 것이다.
지금 속도에서 밀려나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깎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아직 덜 깎였을 뿐이다.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괜찮다.
대신, "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말을 오늘 하루 입 밖에 꺼내지 않는 것.
나이는 못하는 이유가 아니다.
적어도 나이 때문에 뭘 못하고 있다는 변명만큼은,
오늘부터 깎아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