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열무 삼십 단의 무게를 알게 될 때 읽는 한 문장
부모님 댁에 다녀왔다. 신발장 앞에서 신발을 신는 아버지의 등이 보였다. 허리를 숙이는 동작이 예전 같지 않았다. 언제부터 저렇게 작아지셨을까. 한 번도 작다고 느낀 적 없는 사람이 작아져 있었다. 오늘은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갔던 엄마의 이야기를 한다. 아홉 살 아이의 눈에 비친 엄마. 그리고 29년밖에 살지 못한 시인의 이야기.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기형도, 1960년 3월 13일 연평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기우민, 어머니 장옥순. 3남 4녀 중 막내.
4살 때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지금의 광명시 소하동)로 이사했다. 아버지가 직접 집을 지었다. 마을에는 안개가 자주 끼었고, 안양천을 따라 둑방길이 이어져 있었다. 안갯속을 뚫고 노동자들이 인근 기아자동차 공장으로 걸어갔다.
초등학교 3학년, 1969년.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때부터 어머니가 가장이 되었다. 소작을 짓고, 열무를 재배해서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시장이며 개인집이며 팔러 다녔다. 누나 기향도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엄마 걱정'에 나오는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가 바로 우리 어머니의 일상이었다."
기형도는 국 속의 고기를 몰래 어머니 그릇에 옮겨놓을 정도로 어머니를 생각하는 아이였다. 어머니는 먹고사는 일에 바빠 아들에게 표현을 못했지만, 속 깊은 막내를 늘 자랑스러워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바로 위 누나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기형도는 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소하리에서 서울로 통학하며 서울시흥초등학교, 신림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거쳐 1979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연세문학회에서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시작했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기자가 되었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어머니에게 기형도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무엇보다 '시인'이 되어서 좋다."
시집 출간을 준비하던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의 파고다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 아버지와 같은 병이었다. 생일을 엿새 앞둔 스물아홉이었다. 같은 해 5월,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출간되었다. 평론가 김현이 제목을 붙이고 해설을 썼다.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 되었다.
기형도문학관은 시인이 자라고 가족과 함께 살았던 광명시에 2017년 개관했다. 누나 기향도가 명예관장이 되었다. 전시실 한편에는 시인의 유년 시절을 다루는 공간이 있다. 이름은 "유년의 윗목"이다.
이 시의 화자는 아홉 살 전후의 아이다.
어머니는 열무 삼십 단을 머리에 이고 시장에 갔다.
해가 졌는데 돌아오지 않는다.
빈 방에 혼자 남은 아이는 숙제를 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숙제를 한다.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다.
그래도 엄마는 오지 않는다.
배춧잎 같은 발소리, 지치고 느린 엄마의 발소리,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어둡고 무서워진 아이는 금 간 창틈으로 빗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엎드려 운다.
기형도는 이 아이의 상태를 한 문장으로 적었다.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찬밥.
아무도 데워주지 않는 밥.
방에 "담겨" 있다는 표현.
스스로 그 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놓인 것이다.
버려진 것은 아니지만,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상태.
그것이 찬밥이다.
어린 기형도에게 어머니는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가는 사람이었다.
아이의 눈에 그것은 그냥 '엄마가 시장에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른이 된 뒤에야 그 무게를 알게 된다.
열무 삼십 단.
그것은 가난의 무게이고, 생계의 무게이고,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사람의 무게다.
아이 때는 몰랐다.
그냥 엄마가 안 오시는 게 무섭고 외로웠을 뿐이다.
중년이 되면 이 시가 다르게 읽힌다.
아이의 눈이 아니라 어머니의 몸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열무를 이고 시장을 돌아다녔을 어머니의 무릎, 어깨, 허리.
그리고 빈 방에 혼자 둔 아이가 걱정되었을 마음.
"엄마 걱정"이라는 제목이 이중적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엄마를 걱정하는 아이의 마음이면서, 동시에 아이를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이다.
부모님은 어느 날 갑자기 작아지지 않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작아진다.
내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커지는 만큼.
그리고 우리가 천천히 숙제를 하느라 그걸 보지 못한다.
기형도의 아버지는 아홉 살 아들의 앞에서 쓰러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어머니가 열무를 이고 시장에 나갔다.
아이에게 부모의 변화는 늘 갑작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사실 부모는 오래전부터 작아지고 있었다.
지금, 부모님은 어떤 모습인가.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등을 유심히 본 것이 언제인가.
시장에서 장을 봐 무거운 가방을 든 어머니의 손등은.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아버지의 허리는.
우리가 천천히 숙제를 하는 동안,
그분들은 천천히 작아지고 있다.
기형도는 29살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같은 뇌졸중으로. 시집 한 권 못 내고 떠났다.
유고 시집이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 되었다.
그 짧은 생의 가장 깊은 곳에 이 시가 있다.
빈 방에서 울던 아이.
찬밥처럼 방에 담겨 있던 아이.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 기자가 되고 시인이 되었지만,
마음의 어딘가에는 여전히 그 방이 있었다.
마지막 두 줄이 그것을 말해준다.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윗목은 아궁이에서 먼 쪽이다.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온기가 닿지 않는 자리.
기형도의 유년은 윗목이었다.
그런데 그 윗목의 기억이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차가운 기억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역설.
그것은 그 차가운 방에서 기다리던 대상이
바로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나이에 부모님한테 안부 전화가 웬 말이야." 그 말을 오늘 하루 입 밖에 꺼내지 않는 것. 기형도는 어른이 되어서도 국 속의 고기를 몰래 어머니 그릇에 옮겨놓는 사람이었다. 스물아홉의 시인이 부끄러워하지 않은 일을, 우리가 나이 탓으로 미룰 이유는 없다. 전화 한 통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괜찮다. 대신, "쑥스러워서", "나이가 있어서"라는 변명만큼은 오늘부터 깎아내자. 열무 삼십 단의 무게를 알게 된 나이라면, 그만큼의 안부는 건넬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다.
부모님의 마음을 알고 싶을 때,
그런 부모님에게 어떤 문장을 건네야 할지 모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