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이라고 삼켜버린 마음이, 사실은 가장 큰 사랑이었을 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그런데 막상 입을 열면 "밥 먹었어?"가 전부다. 중요한 말일수록 삼키게 된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하고. 그렇게 삼킨 말들이 가슴에 쌓여 어느 날 묵직한 덩어리가 된다. 오늘은 삼킨 말들의 무게를 아는 한 편의 시 이야기를 한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자취
황동규, 1938년 4월 9일 평안남도 숙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나기>의 소설가 황순원. 3남 1녀 중 장남이었다. 1946년, 여덟 살 때 가족 전체가 월남했다. 6.25 전쟁 때는 대구와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소년 황동규는 신문팔이를 하고, 좌판에 앉아 껌과 초콜릿을 팔았다. 껌을 팔면서 윤동주와 김소월을 읽었다.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했다. 고3 시절, 한 살 연상의 여대생을 짝사랑했다. 그 마음을 시로 썼다. 결코 닿지 않을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즐거운 편지>. 1958년, 대학교 2학년 때 이 시가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에 실리며 등단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기다림의 자세를 놓지 않겠다는 선언. 열여덟 살이 쓴 문장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깊이였다.
졸업 후 입대해 번역사병으로 복무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박사를 마쳤다.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뉴욕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68년 서울대 전임강사로 부임해 2003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35년간 영문학을 가르쳤다.
1997년 영화 <편지>에서 환유(박신양)가 정인(최진실)에게 <즐거운 편지>를 읽어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개봉 후 이 시는 다시 한번 온 나라의 입에 올랐다. 2012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이 필적확인란 문구로 쓰였다.
시의 첫 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일이다.
시인은 자기 마음을 사소한 그런 일에 비유한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이 문장이 다르게 읽힌다.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하는 일들이 대부분 그렇다.
아침에 눈을 떠서 상대가 있는지 확인하는 일.
퇴근 후 현관문을 열며 "왔어" 하고 말하는 일.
반찬이 줄었나 살피는 일.
세탁기를 돌려놓는 일.
이런 것들이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매일 반복되는 사소한 일처럼 지나간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사소하다고 믿어버린다는 것이다.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다.
수고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이니까.
삼킨 말이 하나둘 쌓인다.
어느새 가슴에 묵직한 침묵이 들어앉는다.
시인은 이어 쓴다.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오랫동안 전해오던 사소함.
매일 반복했기에 쌓인 것.
말로 하지 못했지만 몸으로 전해온 것.
그것을 모아 한 번 "불러보겠다"라고 한다.
중요한 건 "불러보리라"라는 미래형이다.
아직 부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정작 중요한 말을 하지 못한다.
부모에게, 배우자에게, 오래된 친구에게.
"고마워"를 삼키고 "괜찮아"로 대신한다.
"보고 싶어"를 삼키고 "바쁘지?"로 대신한다.
삼킨 말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가슴 어딘가에 가라앉는다.
시인이 열여덟에 깨달은 것을 우리는 조금은 나이가 들어서야 알아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이 곧 사랑이었다는 것.
사소하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소하지 않았다는 것.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이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듯이,
말없이 건네온 안부가 없었으면 그 관계도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
2연에서 시인은 돌변한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나는 이 문장 때문에 이 시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사랑을 고백하는 시에서 자기 사랑이 끝날 것을 선언하다니.
평론가 김병익은 이렇게 평했다.
"그는 기다리면서 그 기다림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 기다림에 대한 처절한 열망을 몸으로 깨닫고 있다."
나이가 들면 이 문장도 다르게 읽힌다.
모든 관계에는 끝이 있다.
부모는 떠나고, 아이는 독립하고, 오래된 친구도 서서히 멀어진다.
영원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시인은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라고 쓴다.
끝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림의 자세를 놓지 않겠다는 것.
사랑이 그칠 것을 알면서도, 오늘의 사소함을 계속하겠다는 것.
이것이 이 시의 제목이 "즐거운 편지"인 이유일 것이다.
절망을 알면서도 절망에 주저앉지 않는 태도,
그것을 시인은 "즐겁다"라고 이름 붙였다.
말하지 못한 마음이 쌓여서 무거운 밤, 이 시를 떠올려본다.
사소하다고 삼켜버린 그 모든 마음이 사실은 사랑이었고, 오
늘도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는 것.
고마웠던 일, 미안했던 일, 보고 싶었던 마음.
"별일 아닌데"라고 시작해도 괜찮습니다.
내 나이만큼 첫눈이 내리고,
내 나이만큼 봄이 온다는 걸 느끼지만
어느새 그 감동이 느껴지지 않을 때,
그 사소함이 얼마나 오래 쌓여온 마음이었는지 돌아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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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꺼내기 어려우면 여기에 먼저 써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다른 문학을 선정했다가, 도저히 글로 표현하기 어려워 연재를 하루 펑크 내려다 이 시가 생각났어요. 무언가 멋있고 그럴듯한 문장들을 찾아다니다, 언제나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 시가 생각났나 봅니다. 어쩌면 사소하게 생각했던 이 시가, 사소함에 대해 다시 알려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