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가지 못할 곳을 바라보는 사람의 이상한 평온에 대하여
창밖에 먼 산이 보인다. 산꼭대기에 눈이 쌓여 있다. 가보고 싶다. 그런데 가지 않을 것이다. 못 가는 게 아니다. 갈 수 있다. 차를 타면 두 시간이면 된다. 그런데 끝내 가지 않을 것이다. 저 눈은 나 없이도 녹을 것이고, 나 없이도 봄은 올 것이다. 오늘은 그 감각을 단 다섯 줄로 써놓은 시인 이야기를 한다.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이성복, 1952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5남매 중 넷째 아들.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백일장에서 상을 타고, 스스로 서울 유학을 결심했을 만큼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다. 서울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71년 서울대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다. 시가 아니라 프랑스 문학을 공부한 시인이다.
대학에서 운명적인 사람들을 만났다. 은사 김현 — 한국 문학비평의 거목. 그리고 같은 서울대 문리대 문학회에서 황지우, 김석희, 정세용, 진형준을 만났다. 이성복과 황지우는 같은 해 태어나 같은 대학에서 같은 시대를 통과한 친구이자 문학적 동지였다.
1977년, 김현의 추천으로 '문학과지성'에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김현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썼다. "이성복 씨의 시에는 상처받은 젊은이의 아픔이 아픔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그 아픔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우리는 그것이 오히려 씨의 시가 지니고 있는 큰 장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픔의 근원을 특정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누구의 아픔이든 이 시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이 시인에게 특이한 점이 있다. 시집을 거의 10년에 한 권씩 낸다. 40년 가까운 시간에 시집 일곱 권. 그는 자신의 글쓰기를 "나는 왜 시를 쓰지 못했는가"라는 물음의 변주라고 말했다.
1984년 프랑스에 다녀온 뒤 사상에 큰 전환이 왔다. 보들레르와 카프카에서 김소월과 한용운으로, 서양 철학에서 논어와 주역으로. 격렬했던 시어가 따뜻하고 동양적인 서정으로 바뀌었다.
계명대 불어불문학과에서 시작해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 그는, 2012년 명예퇴직한 뒤 대구 팔공산 원룸에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이 시는 다섯 줄이 전부다.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첫 줄은 사실이다.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
보인다.
둘째 줄은 예감이다.
가지 못하리라.
셋째 줄이 핵심이다.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못 가는 게 아니다.
갈 수 있다.
길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다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끝내 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의미를 알고 있는 것 같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하지 않는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연락할 수 있다.
그런데 하지 않는다.
이유를 대자면 백 가지는 되겠지.
바쁘다, 시기가 아니다, 다음에...
그런데 진짜 이유는 모른다.
그냥 끝내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
삶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갈 수 있는데 끝내 가지 않는 곳.
넷째 줄.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이 한 줄에 두 가지 진실이 있다.
하나는, 세상은 나의 참여 없이도 돌아간다는 것.
내가 저 산에 가든 가지 않든, 눈은 녹고 봄은 온다.
나의 슬픔이, 나의 후회가, 나의 미련이 - 계절의 순환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더 묵직하다.
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봄은 온다는 것.
16편에서 박목월이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이라고 썼을 때,
그것은 감각이 있는 동안이 삶이라는 뜻이었다.
이성복은 그다음을 쓴다.
감각이 사라진 뒤에도 세상은 계속된다는 것.
눈은 녹고, 풀은 돋고, 꽃은 핀다.
이것은 절망, 아련함, 우울함 같은 것일까?
이상하게도, 아니다.
시인은 이것을 "슬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슬프다고 말할 수도 없다.
슬퍼할 수 "없는" 것이다.
슬픔이 닿지 않는 영역.
너무 커서 슬픔으로 담을 수 없는 것.
마지막 줄의 반복이 이 시의 무게다.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과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은 같은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앞의 것은 — 슬퍼할 수 없다.
슬픔으로 도달할 수 없다.
뒤의 것은 — 슬퍼할 수조차 없다.
슬퍼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다.
시인이 "가장 애착이 가는 시"라고 밝힌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성복의 시는 처음부터 "아픔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시였다.
그 아픔이 어디서 오는 건지도 알 수 없다.
이 시에서 그 아픔은 마침내 이름을 찾는다.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이름이 없는 것의 이름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
굳이 슬프다고 말할 수 없는, 그렇다고 괜찮다고도 말할 수 없는 어떤 감정.
창밖을 바라보다가,
오래전에 가봤던 곳을 떠올리다가,
이미 지나간 계절을 생각하다가 찾아오는 그것.
5초만. 무엇이 보이든 — 건물이든, 하늘이든, 나무든 — 그냥 바라보세요. 그리고 한 가지만 생각하세요. 저것은 내가 없어도 저기 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 생각이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묘하게 가벼워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내가 저것을 지탱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저것이 나와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것. 그 사실이 주는 이상한 평온.
저는 눈으로 덮인 산을 바라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