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연락이 뜸한 사람들에게

기다리기만 하던 마음이 마침내 움직이는 순간에 대하여

by 황준선

연락처에 이름은 있다.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메시지를 열어보면 6개월 전, 1년 전, 어떤 사람은 3년 전이다. 안부를 묻고 싶은데 뭐라고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요즘 어때?"가 너무 가볍고, "오랜만이다"가 너무 무겁다. 그래서 또 화면을 끈다. 내일 해야지. 내일도 같은 내일이 된다. 오늘은 그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시인 이야기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황지우의 자취

황지우, 195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본명 황재우. 필명 '황지우'는 한글 타자기의 오타에서 비롯되었다. 원고에 이름을 치다가 잘못 찍힌 글자가 마음에 들어 그대로 필명이 되었다.


광주에서 자랐다. 광주중앙초등학교, 광주서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중학교 시절 정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며 문학에 눈을 떴다. 1972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미학과에 입학했다. 시가 아니라 미학을 전공한 시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묻는 학문을 공부하면서 아름다움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는 시의 형식 자체를 부숴버렸다. 기호, 만화, 사진, 다양한 서체를 끌어들여 기존의 시가 하지 못하던 말을 했다. 독재를 향한 풍자였고, 억눌린 시대를 향한 야유였다. 이 시집으로 제3회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1990년, 시집 <게 눈 속의 연꽃>을 냈다. 여기에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실려 있다. 시대의 거친 풍자에서 한 걸음 물러나, 기다림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감정을 평범한 말로 써 내려간 시. 이 시집으로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를 거쳐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한예종 총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고향 해남으로 돌아가 살고 있다. 해남에서 인문 강좌를 열고, 지역 학교를 살리는 일에 나서고 있다. 서울에서 시대를 풍자하던 시인이, 고향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기다리는 동안 일어나는 일

이 시는 약속 장소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본 사람은 안다.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돌린다. 저 사람인가? 아니었다. 또 문이 열린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시인은 이 반복을 이렇게 쓴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일 것이었다가 / 다시 문이 닫힌다."


'너였다가' — 과거형이다.

이미 그 사람이었다고 믿은 순간이 있었다. '너일 것이었다가' — 미래형의 과거다. 그 사람일 거라고 기대했다가, 아닌 걸 알게 된다. 이 두 행 사이에 기다림의 본질이 있다. 확신과 실망이 문 여닫듯 반복되는 것.


우리 일상에도 이런 기다림이 있다.

카톡 알림이 울릴 때마다 혹시 그 사람인가 확인하는 것. SNS에 누군가의 근황이 올라올 때마다 오래 연락 못한 친구를 떠올리는 것. 그런데 확인하고 나면, 또 화면을 끈다. 다시 문이 닫힌다.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시의 전환점은 여기다.

"사랑하는 이여 /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기다리던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앉아서 기다리는 것을 멈추고, 일어나서 걸어간다. 이 한 줄의 전환이 이 시의 핵심이다.


기다림에는 두 종류가 있다.

상대가 와주기를 바라며 가만히 있는 기다림과, 내가 먼저 가는 기다림. 시인은 후자를 택한다. 오지 않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왜 연락 안 하느냐고 탓하지 않는다. 그냥 간다.


우리가 먼저 연락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 이런 것이다.

상대가 먼저 하겠지. 내가 하면 부담스러울까. 너무 오래되어서 어색하지 않을까. 그 사이에 시간이 흐르고, 거리는 더 멀어진다. 시인은 그 모든 망설임을 "마침내"라는 한 단어로 건넌다.


마침내... 오래 미루다가, 드디어.


천천히 오고 있는 너

시의 마지막이 아름답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 너는 지금 오고 있다 / 아주 먼데서 /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내가 너에게 가고 있고, 너도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서로 모르는 채로, 각자의 속도로. 이 마지막 행에 시인이 믿는 것이 들어 있다. 관계는 한쪽만 움직여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내가 한 발 내딛으면, 상대도 어딘가에서 한 발 내딛고 있다는 것.


오래 연락 못한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본 사람은 안다.

"야, 잘 지내?" 이 한 마디를 보내는 데 며칠을 고민하는데, 돌아오는 답은 의외로 빠르다. "어, 나도 연락하려고 했어." 그 사람도 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먼데서, 천천히.


이 시가 1980년대 민주화를 기다리는 시로도 읽히고, 연인을 기다리는 시로도 읽히고, 오래된 친구를 그리워하는 시로도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다림의 구조는 같기 때문이다.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며 앉아 있을 것인가, 마침내 일어나 먼저 갈 것인가.


오늘, 연락처를 한 번 스크롤해 보세요.

6개월 이상 연락하지 않은 이름이 보일 겁니다. 그 사람에게 딱 한 줄만 보내보세요. "요즘 잘 지내?" — 이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긴 안부가 필요 없습니다. 거창한 이유도 필요 없습니다. 시인의 말대로, 마침내 먼저 가는 것. 그것만으로 닫혀 있던 문이 다시 열립니다.

오늘 먼저 연락한 사람이 있나요? 상대의 반응은 어땠나요? 댓글로 남겨주세요. 먼저 간 사람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먼저 연락하지 못해 미안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어떤 문장을 건네야 할지 고민된다면,

'착하고, 섬세하고, 독특하고, 완벽주의자인 당신을 위한 문장들'에서

인사의 첫 문장을 찾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