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 <낙화>, 가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대하여, 이 시리즈를 마치며

by 황준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때, 말을 멈춰야 할 때, 붙잡던 손을 놓아야 할 때 — 우리는 그 순간을 자꾸 미룬다. 아쉬움이나 미련, 또는 집착 그런 것들. 그러나 정작 때를 알고 돌아선 사람의 뒷모습은 슬프기보다 아름답다. 미련 없이 걸어가는 걸음에서 오히려 빛이 난다. 오늘은 꽃이 지는 장면에서 그 비밀을 발견한 시인 이야기를 한다. 결별을 슬픔이 아니라 축복으로 읽는 시. 스물네 살의 청년이 써놓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외우는 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의 자취

이형기, 193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진주농림학교(진주농고) 시절, 제1회 개천예술제 백일장에서 장원했다. 열여섯 살이었다.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


이듬해인 1950년, 서정주의 추천으로 [문예]지에 <비 오는 날>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열일곱 살. 한국 문단 최연소 등단 기록이었다.


그는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연합신문, 동양통신, 서울신문 기자, 대한일보 정치부장·문화부장, 국제신문 편집국장. 날카로운 현실 감각을 가진 기자이자, 동시에 존재의 본질을 묻는 시인이었다. 낮에는 기사를 쓰고 밤에는 시를 썼다.


1957년, 스물네 살에 <낙화>를 썼다. 이후 국어 교과서에 실려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읽어본 시가 되었다. 꽃이 지는 장면을 이렇게 아름답게 쓴 시가 있었나 싶은 시.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인은 아내 조은숙에게 구술하여 시를 받아 적게 했다. 병상에서 써낸 마지막 시편들은 삶은 끊임없는 소멸이라는 주제였다.


2005년 2월 2일 별세. 향년 73세. 한국시인협회장(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가야 할 때를 아는 것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시의 첫 세 줄이 전부라고 해도 좋다.

가야 할 때를 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안다.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때를 모르는 사람,

말을 멈춰야 할 때를 모르는 사람,

관계를 정리해야 할 때를 모르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때를 아는 일이다.

그런데 시인은 거기에 "아름답다"를 붙인다.

가는 것이 슬프다가 아니라, 가는 뒷모습이 아름답다.


이 전환이 이 시의 핵심이다.

돌아가야 할 때를 알고 돌아가는 사람의 뒷모습에도 무언가가 있다.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알고 가는 것.

그 차이가 두 뒷모습을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든다.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결별이 축복을 이룩한다.

역설이다.


보통 결별은 상실이고,

축복은 만남에 붙는 말이다.


그런데 시인은 뒤집는다.

헤어짐이 축복이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


꽃이 지지 않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봄이 끝나지 않으면 여름이 오지 않는다.

노래가 끝이 나야 노래를 들은 것이다.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이란,

끝이 있기 때문에 다음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시리즈도 그렇다.

스무 편의 글이 끝나고 떠난다.

글들이 오래 머물길 바라기에 떠나야 한다.


떠나야 독자 각자의 삶 속에서 문장 하나가 불현듯 떠오르는 순간이 생긴다.

퇴근길에, 새벽에, 누군가를 보내는 자리에서.


내 영혼의 슬픈 눈

시의 마지막.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결별 뒤에 남는 것이 있다.

텅 빈 것이 아니라, 샘터에 물이 고이듯 천천히 차오르는 것.


시인은 그것을 "성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슬픈 눈"이라고 부른다.


슬프지만 성숙하는 눈.

이별을 겪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샘터의 물이 지금은 고여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 물이 솟아오른다.


누군가의 안부를 물을 때,

포기했던 것을 다시 꺼낼 때,

먼저 연락할 용기를 낼 때,

멈춰 서서 작은 것들을 볼 때.


가야 할 때가 왔다.

분명히 알고 간다.

스무 개의 문장들이 끝난다.


하롱하롱 꽃잎이 지듯,

이 시리즈도 여기서 놓는다.


그리고 각자의 봄을 향해,

각자의 열매를 향해,

돌아간다.

빈 의자와 펼쳐진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