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중에 태어난 둘째(찰떡이)는 어느덧 100일을 훌쩍 넘겼다. 휴직 때 겨우 18개월이었던 첫째(꿀떡이)는 만 두 살을 훌쩍 넘기고 이제 곧 어린이집 적응에 들어갈 예정이다.
휴직 직후만 해도 꿀떡이와 단 둘이 있는 것이 '도전'이었던 나는, 이제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에 꿀떡이와 단 둘이 문화센터에 가고 점심식사까지 하고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휴직하기 전에는 아이인 꿀떡이와 단 둘이 하루를 보내던 아내는,이제 하루종일 나와 '어른 간의 대화'를 하고육아와관련한 모든 부분을 나와 함께 논의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그렇게 정확히 휴직 반년이 되던 지난 월요일, 상사로부터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짧은 연락이 왔다.
얼마 전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휴직 후 세 번째 연락이었는데, 내가 속한 조직이 승격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부서가 승격되었다는 것은 조직장(임원)의 직위가 승격되었다는 뜻이고, 통상 임원의 직위가 승격되었다는 건 막중한 책임과 함께 그 부서의 일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승격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휴직자에게 '부서 승격' 자체는 큰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너 언제 돌아올 거니'에 대한 대답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예단(豫斷) 해본다. 휴직이 6개월 지났다는 건복직예정일도 6개월 남았다는 뜻이니 말이다.
회사로 돌아간다? 사실 실감이 안 난다. 매일 우리 집 아이들과 지지고 볶다가 이제 다른 집 어른들(?)과 지지고 볶아야 한다니 말이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육아와 회사생활을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는 '양해'가 불가하다는 점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에, 회사에서도 사람 또는 부서 간에 꽤나 자주 '양해'를 구한다. 그럴 때마다 사안에 따라 안 좋은 말도 듣고 그래서 마음이 상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서로 어느 정도 이해해 주는 편이다. 회사에서 하는 모든 형태의 소통은 '어른 간의 소통'이기 때문에.
육아에서는 다르다. 회사와 달리육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소통은 '어른과 아이 간의 소통'이고, 아이는 결코 어른을 '양해'해주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는 양해해 줄 수 없다. 더 슬픈 것은 어른은 아이를 끊임없이 '양해'해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육아라는 짧은 단어에는 성숙한 존재(어른)가 미성숙한 존재(아이)를 이해해 주고 가르치고 사랑하며 키워낸다는 무서운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 집 아이는 얌전해서 양해 가능한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육아를 해보지 않은 것일 것이다. 우리 꿀떡이도 밖에서는 엄청 얌전하고 착한 아이다. 그런데 집에서는 아주 그냥 (생략).
육아? 속상하며 속상함 가르치기
만 2살이 넘으며 꿀떡이는 부쩍 떼가 늘었다. '~말라'로 끝나는 말만 들으면 일단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오열을 하곤 한다. 아이 자유롭게 좀 키우지 뭘 그렇게 못하게 하냐고? 별 거 없다. '달리는 차에 뛰어들지 마라', '뜨거운 프라이팬을 만지지 마라', '더러운 베란다 창틀을 만지고 입에 가져다 대지 마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 손을 넣으려 하지 마라'와 같은 것들이다.
부모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들은 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아이는 아직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육아에는 훈육이 포함되어 있고, 훈육에는 강제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자기 뜻대로 못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떼를 쓰며 우는 것인데, 이걸 보고 있는 부모는 아무리 어른이어도 스트레스를 받고 속이 상한다.
아내는 예전부터 꿀떡이가 떼를 쓸 때면 "속이 상해? 그러면 엄마한테 '속상하다'고 말하고 와서 안겨"라고 반복해서 가르쳤다. 그랬더니 꿀떡이는 요즘 하루에도 수십 번씩 '속상해요!' 하면서 기계적으로 엄마를 찾는데, 이걸 보고 있으면 힘들다가도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아빠를 찾는 것'은 입력하지 않아서 속상할 때마다 무조건 엄마만 찾는 게 부작용이긴 하지만.
유튜브, TV매체 등에서 소아과 의사 선생님들이 '아이들은 좌절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라고 하시던데, 내가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는 당연스레 느껴진 저 말이 내가 좌절 강사(?)가 되고 보니 정말 뼈저리게 맞는 말이면서도 뼈저리게 뚜드려 맞는 느낌이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가 말도 안되는 이유로 눈앞에서 10분이고 20분이고 엉엉 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회사를 무대로 하는 사회생활에서는 속상해도 티 안 내고 삭히는 법을 배웠는데, 집을 무대로 하는 육아에서는 건강하게 속상하는 법을 아이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무엇이 더 어렵냐고? 경험상 난 후자다. 사랑하는 아이에게 속상함을 가르치는 건 무엇보다 속상한 경험이었다.
뒷모습에서도 고집이 느껴지는 꿀떡이 (Feat. 왕관 좋아함)
'1+1=4'의 육아
그래서일까. 육아에서 어른이 한 명 있는 것과 두 명 있는 것은 천지차이다.
혼자 육아하는 것은 정말 몸도 마음도 녹아내릴 정도로 힘들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간간히 반나절 정도 혼자서 두 아이를 본 적이 있는데, 첫째는 속상하다고 울고 둘째는 배고프다고 울고 아주 난리도 아니다.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쉬는 건 언감생심. 속상하다고 우는 첫째에게 '동생이 배고파 보이는데 분유만 먼저 줘도 될까?'라고 묻는 순간 울음소리는 더 커진다. 두 아이를 안느라 손목과 허리도 박살, 우는 소리에 청력도 박살, 무엇보다 그 혼란의 광경 가운데 멘탈은 바사삭인 것이다.
그런데 둘이서 육아하는 것은 훨씬 수월하다. 한 사람이 아이를 보는 사이 다른 사람이 화장실도 갈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고 잠시 산책을 가거나 쉴 수도 있다. 어른이 두 명이면 무려 '양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려 '어른 간의 일상 대화'도 가능하다. 뽀로로와 핑크퐁, 키치티니핑 말고.
겨우 어른 한 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어른 한 명이 함께 육아함으로 '양해가 없는 곳'이 '양해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바뀐다.
'1+1=4'이 가능한 게 바로 육아의 현장인 것이다.
머리로 아는 것과 경험해 보는 것의 차이
개인적으로는 이 '1+1=4'의 육아를 경험해 본 것이 육아휴직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도 '육아는 힘들다', '육아는 외롭다'라는 생각을 하고 머리로는 나름 이해하고 있었지만, 실제 그 차이를 몸소 경험해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휴직 전에는 주로 아내의 표정과 말투로 상황을 파악했다면, 이제는 '아내가 아이들과 혼자 있다'는 상황을 인지함과 동시에 마음이 다급해지곤 한다.
어른 혼자 아이(들)와 반나절 이상 있다는 것을 일종의 위기상황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위기상황이 맞다. 아니라고? 그럼 위기상황도 아닌데 아이들만 데리고 1박 2일 여행이라도 다녀와보시던지 ㅎ.
더 많은 아빠들이 짧게라도 육아휴직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아빠 육아휴직'을 법적으로 의무화해서라도 말이다. 그래서 왜 육아가 '1+1=4'인지 남편과 아내, 아빠와 엄마 모두가 직접 경험할 수 있었으면 너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혼자 하는 육아보다 둘이 하는 육아가 2배로 쉽고 4배로 행복하다는 걸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