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 잠든 아내와 두 아이를 방에 두고 거실에서 빨래를 개고 있다. 내일 아침이면 어느새 내 품에 들어와 '발 간질간질해줘'라고 속삭이는 첫째 꿀떡이의 칭얼거림에 잠에서 깨고, 뒤집기에 한창 빠져 혼자 몸을 뒤집은 채 방긋방긋 웃는 둘째 찰떡이와 눈이 마주칠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또 시작될 것이고.
누군가의 아빠가 될 것이라고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20대 중반이 넘어서까지 연애를 한 번도 안(못)했던 내게, '아빠가 된다는 것'은 너무 먼 나라 이야기였다. 20대 초반에는 의사가 되어 전 세계로 봉사활동을 다니는 것이 꿈이었는데, 20대 중반부터는 '뭐라도 되겠지'라며 흘러가는 대로 정처 없이 살았다.어렸던 10대부터 파릇했던 20대까지, 내가 스스로 그려온 삶의 모양에 '아빠가 되는 것'은 항목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한 아이도 아니고 무려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육아휴직을 해서 아이들과 반년째 뒹굴며 비어 가는 통장 잔고와 끊어진 커리어를 덤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무려 혼자 빨래를 개면서.
인생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지금 내가 그렇다.
신기한 것은, 아빠가 되고 나니 그전에 가지고 있던 여러 후회나 미련들이 모두 정리되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따끔하게 신경 쓰이던 자갈들이 큰 파도에 휩쓸려 넓은 바다로 흘러가버린 느낌이랄까?
'그때 조금 더 열심히 해봤으면 어땠을까?', '그때 조금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그때 이랬으면...' 등의 생각들이, '그랬다면 지금 이 아이들을 못 만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모두 하찮고 의미 없는 것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꿀떡이와 찰떡이를 만나고 나의 삶에는 더 이상의 남은 후회나 미련이 없어졌다. 더 정확히는, 그 어떤 후회와 미련도 이 아이들을 포기하고 시간을 되돌릴 만큼 가치 있지 않았다.
울고 떼쓰고 난리 쳐도 예쁘고 귀여운 똥강아지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이들의 소중함 때문일까.
아빠가 되고 나니, 뒤를 돌아보기보단 앞을 보게 되는 것 같다. 두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그리다 보면, 적어도 20년 정도는 그 세상을 그리는 화가이자 또 지키는 파수꾼이 아내와 나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마다 발걸음이 훨씬 신중하고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혼자일 때보다 결혼했을 때, 결혼했을 때보다 아이가 생겼을 때 더욱 그렇다.
초등학교 때인가. 아빠가 생일편지를 써주신 적이 있다. 한 장짜리 손편지였는데, 다른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한 가지 문구가 선명히 기억난다.
"아빠가 . . .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줄게."
어렸던 당시에는 저 말이 든든하면서도 '용돈을 많이 주시려나'하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서야 '든든한 울타리'라는 말에 담긴 아빠의막막하고도 비장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훔쳐볼 수 있게 되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 누군가의 울타리가 되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무거운 일인지를 말이다.
나는 우리 아빠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꿀떡이와 찰떡이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을까. 그래서 동화에서는 그토록 당연한 '행복한 일상'을 지켜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