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두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아내와 나란히 누워 '과거에 후회되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대학생 때는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지금 돌아보면 무작정 부딪혀도 잃을 것이 없던 시기인데. 왜 다양한 경험을 해볼 생각을 못했을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만큼 몸이 가벼웠던, 동시에 무엇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만 무거웠던 어리숙한 그때를 이야기하며 둘이 깔깔 웃었다.
그러다 문득, '10년 후 우리는 지금의 우리 모습을 후회할까'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후회할 것 같다. '두 아이를 키운다'는 사실은 실로 무겁지만, 가끔은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는 비겁한 변명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충분히 이것저것 도전할 수 있는 나이이고, 쉽진 않겠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기이다. 그게 공부든, 이직이든, 아니면 취미생활이나 운동이든 뭐든.
그렇게 아내와 두 아이가 잠들고 혼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적어도 하나 했기 때문이다.
바로 육아휴직이다.
육아는 힘들었다
육아는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었다.
혼자 하는 육아도 아니고, 7개월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아내와 함께해 온 공동 육아였다. 그런데 앞에 무슨 형용사를 가져다 붙여도 육아는 육아였다.
뭐가 어렵냐고? 글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눈을 감고 지난 하루만 되돌아봐도 수백 가지의 기억들이 뒤엉켜버리는 느낌이랄까. 일단 아이의 앙칼진 울음소리. 아이의 아침을 준비하다 보면 놓칠 수 있는 내 아침, 아이의 기저귀를 갈다 보면 놓칠 수 있는 내 샤워, 아이를 카시트에 태우다 보면 까먹는 내 안전벨트, 아이의 열감기를 간호하다 보면 아픈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내 감기,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다가 놓칠 수 있는 내 마음, 그리고 아이의 감정을 추슬러주다가 놓쳐버리는 내 감정 등등.
몸뿐 아니라 정신도 함께 커가는 아이는, 자라나며 부모에게 어마어마한 인내를 요구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이지만, 오늘만 해도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참아가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현실 육아는 TV 매체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과 '지옥 같은 모습'을 한 바구니에 모두 담고 있었다.
회사에 다니며 '참여'한 육아와 휴직을 하고 '동반'한 육아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힘들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사실, '육아가 힘들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과정을 아내 혼자 견뎌야 했을 테니 말이다. 둘째 찰떡이 출산 전에는 몸이 무거워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던 아내가 그 몸으로 첫째 꿀떡이를 봐야 했을 것이고, 출산 후 '동생의 등장(?)'으로 한껏 예민했던 꿀떡이의 감정 기복을 혼자 받아내야 했을 것이다. 그뿐인가. 두 아이 중 하나라도 아프면 신생아를 안은 채로 말썽꾸러기 2살 아이의 손을 잡고 혼자 소아과에 갔다 왔을 것이다.
물론 어른(이라고 쓰고 꼰대라고 읽지만)들 말씀처럼 다 할 수 있다. 못할 건 없다. 하지만 육아를 하다 보면 이 모든 것이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몰려오는 날이 반드시 있다. 그리고 육아는 쉴 틈이 없다. 회사처럼 '잠깐 커피 좀 마시고 올게요'라고 했을 때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이 없다. '엄마도 힘들어'라는 말에는 더 크고 앙칼진 울음이 부메랑처럼 다가올 뿐. 화장실 갈 때 문도 닫을 수 없는걸?
육아를 하며 수많은 '처음'을 마주했다. 아이와 처음 단 둘이 식사하기, 아이와 처음 단 둘이 외출하기, 아이와 처음 문화센터 가기, 아이와 단 둘이 처음 병원 가기, 아이와 단 둘이 처음 낮잠 자기, 아이와 단 둘이 처음 밤잠 자기 등등.
신기한 것은, 내가 육아휴직을 하며 아내도 수많은 '처음'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후) 아이 없이 처음으로 친구와 단 둘이 만나기, 아이 없이 혼자 집에 있어보기, 평일 낮에 혼자 편의점 다녀오거나 동네 산책하기, 운전 교습받기, 아이 문화센터 선생님 얼굴 모르기, 아이 소아과 담당 선생님 바뀐 줄 모르기, 아이가 요즘 좋아하는 놀이나 동화책 모르기, 놀이터에서 만난 동네 친구들 모르기 등등.
내 육아가 힘들었던 만큼, 아내의 육아는 조금 가벼워졌다.
"육아휴직 어때요?"
나는 아빠들에게 육아휴직을 추천한다.
육아휴직은 육아 '참여자'이자 '관찰자'였던 나를 '아내의 동반자'이자 '아이들의 보호자'로 거듭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자동으로 보호자 아니냐고? 글쎄. 개인적으로는 소아과 선생님 문진에 아이 대신 대답해주지 못하는 사람은 보호자라고 말할 수 없다고 본다).
서로 사랑해서 부부의 연을 맺고, '함께'할 수 있는 것 중 '육아'만 한 것이 있을까?두 사람이 사랑해서 태어난 아이가 자라나는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보고 경험하며 나눌 수 있는 기회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실제로 나는 육아휴직을 하면서 아내의 일상을 바라보는 각도도, 아이의 행동을 바라보는 관점도 모두 바뀌었다. 나뿐 아니라 아내도 바뀌었다. 예전에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육아를 했다면, 이제는 '언제든 힘들면 남편에게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남편인 내가 육아의 '동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힘들다는 '육아'를 함께 하며 아내와 나는 '부부로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걷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육아는 '아이'에 대한 것뿐 아니라 '부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배웠다.
다시 말하지만 육아는 힘들다. 그렇기에 더욱 아빠들에게 육아휴직을 권한다. 지금도 흘러가는 아내와 아이들의 시간 속으로 용기 있게 풍덩 빠지길 바란다. 물은 생각했던 것보다 차갑고 깊을 테지만, 그 안에서 가족들과 함께 손 잡고 헤엄치던 소중한 기억은 영원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