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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천동잠실러 Feb 28. 2024

복직하니 보이는 것들

그리고 다시 정립한 '워라밸'의 의미

2024. 2. 28. (수)


오늘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육아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아빠로서라기보단 직장인으로서의 이야기다.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로 돌아가야 한다.




처음 입사하고 만난 팀장은 마이크로매니저였다


화장실만 가려고 해도 '어디 가냐'라고 물었고, 보고서 문단 간의 길이(?)를 모니터 화면에서 자로 재는 등 매사 근거 없는 불안함이 많은 불안정한 분이었다. 당연히 회사에서 대다수의 사람이 힘들어했고, 결국 단체로 대표이사에게 찾아가 같이 일 못하겠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직속 부하직원인 나는 가장 힘든 사람 중 하나였다. 파일 암호해제가 안된다고 주말에 전화해서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거나, 본인 일에 대해서 갑자기 '이건 다 네 책임이다'라며 난리를 치는 건 다반사였다. 결국 참고 참다 사직서를 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회사에서는 고심 끝에 나를 남기고 팀장을 다른 팀으로 보냈다. 한 달쯤 지나니 임원이 채용되었는데, 이 사람은 또 너무 매크로매니저였다. 일의 디테일은 관심도 없고 또 맡아서 하기엔 실무 경험이 부족한 분이었다. 거기다 심한 기분파라, 어느 날엔 모든 결재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승인되다가, 어떤 날엔 아무리 타당한 결재나 보고에도 소리를 지르고 종이를 얼굴에 던지기 일쑤였다. 모든 팀원들이 매일 임원의 안색만 살펴보며 겨우살이를 해내곤 했다.


그런 팀장, 임원을 겪다 보니 결국 번아웃이 왔다. 와중에 회사에서는 나름 승진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았지만 속으론 알게 모르게 화가 쌓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육아휴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회사에 다시 돌아오니 새로운 것이 많이 보인다. 


아니 어쩌면, 그대로인 회사를 바라보는 내 관점이 변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느끼는 것 하나는 '마음의 여유'인 것 같다. 가족들과 온전히 함께 지낸 지난 1년의 휴직 기간은 내게 여유라는 선물을 주었다.


휴직 중 겪었던 육아의 일상이 가벼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집에서 감당하는 육아의 강도는 높았지만, 회사라는 다른 환경으로 돌아와 보니 육아인(?)이 아닌 직장인으로서는 회사, 동료, 그리고 그 속의 나를 조금은 먼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한 번 쉬어가며 공백기를 가져보니, 평소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커리어'라는 것에 대해서도 찬찬히 고민해 보게 되었다. 사실 회사를 다닐 때는 매일 근근이 버티기 바빠서 중장기적인 모습을 보기는 어려울 때가 있지 않는가 말이다.


직장을 온전히 걷어내고 가정이라는 환경에 나를 온전히 던졌던 경험, 나의 아빠 육아휴직은 비단 아내나 아이에게만 선물 같은 시간이 아니라, 아빠이자 직장인으로서의  나에게도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감사하고, 보이지 않던 동료들의 모습에 시선이 가고, 무엇보다 회사와 그 안에서의 일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를 고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니 말이다.


돌도 안 지났으면서 먼 산 보며 멍 때리는 찰떡이 (Feat. 가릴래야 가릴 수 없는 오동통 볼살)




직장을 다니며 느끼는 삶의 무게가 있다. 


퇴근길에 가끔, 직장에서의 여러 사건들과 그 속의 감정들이 눈처럼 어깨에 쌓여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예전엔 그 눈이 계속 쌓이다 얼음이 되어 날카롭게 변해가는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는데, 요즘은 그 눈들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사르르 녹아버리는 느낌이다. '아빠다!' 하는 아내의 외침과, '타다다닥' 뛰어 (또는 기어)오는 아이들의 발(또는 무릎)자국 소리를 듣는 그 순간에 말이다.


육아휴직 후 복직을 해보니, '워라밸'의 의미가 조금 색다르게 다가온다. 내게 워라밸이란, 차가운 직장과 따뜻한 육아, 그 중간 어디쯤에서의 균형이다. 하루 종일 육아만 한다고 해도 더워서 열사병에 걸릴 것 같고, 그렇다고 일만 한다면 얼어 죽는다. 육아와 일, 뭐가 더 힘들고 어렵다고 하기보단 서로 다른 것이고, 무엇보다 한쪽에 너무 치우치지 않는 균형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그래서 요즘은, 직장에서 감기 걸리기 전에 얼른 집으로 뛰어가 아이들과 동화책을 읽으며 어깨에 켜켜이 쌓인 눈을 녹이곤 한다. 그리고 그 잠시 동안이나마, 하루 종일 열대야에 있었던 아내도 잠시 눈 구경 하며 찬 바람으로 몸을 식힐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내와 나는 서로 다르지만 또 같은 '워라밸'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보기만 해도 추운 새벽 출근길 (그런데 또 사진으로 보니 뭔가 예쁜...)
번개처럼 빨리 기어다니는 찰떡이 I 동화책 읽는데 쓸데없이 진지한 꿀찰떡이 I 열대아 육아에 지친 아내의 짠한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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