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와도 조기축구는 하듯
2025. 3. 20. (목)
"나 이번 주말에 다녀와도 돼?"
아내가 오랜만에 전 회사사람들과 주말 약속이 잡혔다며 다녀와도 되냐고 물었다. 그걸 왜 허락을 받냐니까 본인이 가면 내가 애 둘을 혼자 봐야 해서 미안하단다. 남의 애들 봐달라는 것도 아니고 내 새끼들인데 뭐가 미안하냐니까 '주중에 일하느라 피곤한데 주말에도 일 시키는 것 같아서' 그렇다는 대답을 들었다.
생각해 보게 되었다. 육아는 내게 '일'인가?
난 많이 놀아본 남자다.
정말 많이, 더 놀 수 없을 만큼 놀았다. 건전하지 않은 유흥이나 여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기부터 정말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제한 없이 해봤다는 뜻이다.
남들 한창 종합학원 다니고 공부에 매진할 때 나는 축구부이자 농구부였고, 드럼학원을 다니면서 또 교회에서는 어깨너머로 배운 베이스 기타를 치고, 궁금증에 빠져 한강 물에 부레옥잠이 자라는지를 알아보려고 주말에 한강에 가서 ph를 재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집에서 부레옥잠을 키웠다. 해리포터에 빠졌을 때는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10권이 넘는 책들을 계속 읽다 꿈에서 주인공들을 만나기도 했다.
좋아하면 해봤다. 그러다 깨달았다. 좋아하면, 진짜 좋아하면 주말도 허기짐도 없다는 것을. 좋아하면 워라밸은 생각조차 나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독박이 문제가 아니라
요즘 독박육아라는 게 키워드인가 보다. 가끔 유튜브 숏츠로 보는 육아 프로그램들에서도 흔히 나오는 단어이자 개념인 것 같다. 그 단어 자체에 '육아는 힘들다' '육아는 일이다'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 육아는 힘들다. 주중에 열심히 일한 내 몸도 힘들다. 통근 3시간에 가끔 야근까지 하고 집에서도 가끔 해외 업체와 컨퍼런스 콜도 하니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그런데 육아가 일은 아닌 것 같다. 육아는 내가 과거에 '좋아하던'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고 나를 행복하게 한다. 아이들과 함께 뒹굴며 느끼는 희로애락의 깊이는, 나름 놀아봤다는 내가 좋아하던 많은 것들의 깊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행복, 그 깊이를 어떻게 말과 글로 표현할까. 직접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결코 모를 것이다.
내게 육아는 일이 아니다.
중학교 때인가. 태풍이 와서 전광판이 쓰러지고 창밖이 빗줄기로 가득하던 날, 평소에 사람이 많은 농구코트가 비어있다며 농구공을 들고나가는 나를 누나는 미쳤다고 했다. 너무 좋아하다 보니 날씨는 안 보이고 혼자 슛연습하기 좋은 텅 빈 코트만 보였던 것이다.
내게 육아는 일이 아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과 같은 시간 속 같은 순간을 공유하는 것이 좋다. 몸과 정신은 힘들지만, 이 '좋음'이 모든 것을 덮는다.
태풍이 몰고 온 세찬 빗줄기에 옷은 젖고 몸은 추워 바들바들 떨렸지만 아무 상관이 없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 추위와 떨림은 기억조차 없이, 그 세찬 빗줄기 소리와 함께 '철썩'하며 림에 빨려 들어가던 농구공만 기억에 남아 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좋다. 이 아이들이 내게 와주어서 감사하다. 이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해서 기쁘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내게 육아는 일이 아니다. 지난 5년 동안 그랬고, 앞으로 5년 동안 그러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