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후 집에 돌아오는 길,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첫째 꿀떡이가 이앓이를 할 때 생각이 났다. 꿀떡이는 이앓이를 꽤 심하게 하고 지나갔던 편이었다. 1주일 내내 새벽마다 울면서 깨어 1시간을 넘게 울기 일쑤였는데, 몸부림을 치며 오열하는 아이 앞에서 초보 엄마아빠였던 우리는 정말 진땀을 뺐다. 나중에야 나름의 노하우(?)가 생겨서 이앓이 캔디를 사서 입에 넣어주거나 얼음을 손수건에 싸서 물려주는 등의 방법으로 아이를 진정시키곤 했는데, 진정이 되더라도 다시 재우고 나면 2~3시간이 훌쩍 지나곤 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하루종일 육아에 찌들어 피곤한 채로, 나는 나대로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잔 채 출근 준비를 하며 무거운 몸으로 각자의 일상에 복귀하곤 하던 힘든 날들이었다.
겪어보니 이앓이는 오히려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런데 사실, 겪어보니 이앓이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꿀떡이가밤에 침대에서 놀다가 팔이 빠져서 응급실에 갔던 날도 있었고, 돌이 갓 지나서뛰어다니다 넘어져 팔이 부러진 탓에 가장 더운 여름에 통깁스를 하고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독감이나 코로나로 아이 체온이 40도를 왔다 갔다 하는 날이면 아내는 새벽 내내 아이 열을 재고 나는 소아과 진료가 가능한 응급실을 알아보느라 병원마다 연락을 돌리곤 했다.
그 외에도 아이를 키우며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며 다시 떠올려도 아찔한 그 순간들마다 빠짐없이 힘이 들었다. 아이와 관련된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그래서 서툴고 무서웠다.
(부모 속이 타는 줄은 모르고) 팔이 부러져도 책은 읽고, 장난은 치고, 또 사고도 쳐야 하는 바쁜 꿀떡이
"우린 진짜 천둥벌거숭이들이었다"
부끄럽게도, 아내와 나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의 무게와 의미를 몰랐다.
아내와 나는 결혼할 때 그저 서로가 좋았다. 코로나가 악화되어 신혼여행을 해외가 아닌 국내로 가게 되었을 때도, '어디로든 둘이 갈 수 있다'며 신나 했다. 주변 사람들이 '신혼여행 가서 싸우지 마라'라고 농담을 하곤 했는데, 우리는 싸울 일이 없었다. 둘이 놀러 다니고 수다 떨기 바빴다. 그렇게 철이 없었다.
육아 중이었던 주변 친구나 선배들이 '너무 빨리 아이를 가지진 마라'라고 흘리듯 얘기할 때, 그 말의 함축적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님들이 '세탁기와 건조기는 큰 것으로 해라'라고 조언하실 때, 우리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며 농담을 하다 혼나곤 했으니 말이다. 과거의 나 제발 닥쳐. 그 입 닥치라고.
그렇게, 아내와 나는 결혼을 준비하며 단 한 번도 '아이를 키운다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나는 자연스레 아이를 '함께' 맞이하기 시작했다.
꿀떡이가 생긴 후 내 연차는 모두 산부인과 방문 목적으로 쓰였다. 특별한 생각이 있었다기보다는, 아이를 보러 가는데 아빠인 내가 안 가는 게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는 임신을 안 하니까 산부인과 정도는 같이 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일종의 의무감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의사 선생님은 내가 백수인 줄 아셨을 수도....
임신 중에 아내가 임신성 당뇨로 채식을 할 때 나도 같이 채식을 하고손가락도 같이 찔렀다. 출산 직전에는 유튜브에서 '출산 때 남편이 도와줄 수 있는 호흡법'을 보고 실제 출산 때 함께 호흡을 하기도 했다. 뭔가 깊은 고민이나 준비된 가치관이 있었다기보단, 그냥 '우리'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를 찾아온 아이를 뱃속에 오롯이 혼자 품어내야 하는 아내에게 미안했다. 지근거리에서 본 임신의 과정은 그만큼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와 나 모두 아이와 관련해서는 천둥벌거숭이들이었지만, 부부로서 서로를 아끼고 안쓰러워할 줄은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와 관련해서는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함께' 했다. 누구 한 사람의 아이가 아닌, '우리'의 아이였기 때문이다.
베이비페어와 산부인과에 같이 갔던 추억 + 입체 초음파에서도 가드 올리고 있던 꿀떡이
가족을 이루어 나가는 것
천둥벌거숭이여도 괜찮아.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지난 3년여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힘든 일들이 많았는데 어찌어찌 겪어내며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은 매 순간 아내와 내가 '함께'였기 때문이다. 비록 아이를 맞이하고 키우는 것에 대해 다른 이들처럼 미리 공부하거나 면밀히 준비하지 못했지만, 우리 둘이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부부였기에 우리를 찾아온 새로운 가족인 꿀떡이를 잘 맞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동일한 방식으로 키워가고 있고.
그리고 오히려, 당시에는 힘들었던 많은 기억들이 시간이 지나며 우리 가족만의 추억이 되곤 한다. 꿀떡이가 1시간 넘게 울며 이앓이를 하다 얼음을 물려주니 눈이 동그래지며 울음을 뚝 그치던 순간, 코로나로 응급실에 갔다가 새벽에 돌아오는데 꿀떡이가 '주사.. 콕.. 사자처럼 (동화책에 사자가 주사를 씩씩하게 잘 맞는다는 내용이 있다)'이라고 중얼거려서 아내와 함께 피식하던 순간 등등.
서로 사랑하며 가족을 이루다.
결혼을 흔히 '가족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가족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지만, 그 가족을 이루어나가는 원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동일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결혼할 당시에는 두 아이의 아빠가 되는 것을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내가찰떡이라는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것이 크게 두렵지 않은 이유 또한, 아내와 나, 그리고 꿀떡이까지 우리 세 가족이 지금서로 사랑하고 보듬어가며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겪어보니 정말 쉬운 것이 아니고, 아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산 넘어 산'의 반복일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산들을 넘어가는 과정이 은근히 기대된다. 물론 힘들겠지만, 아내와 꿀떡이, 그리고 찰떡이까지 '함께' 가는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우당탕탕 살아가도 가족을 이루어나가는 것은 결국 그런 것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