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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천동잠실러 Mar 17. 2023

육아, 찬란하게 아름다운

두 아이를 낳은 아내가 내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2023. 3. 17. (금)


"오빠는 행복해?"


오늘 저녁, 첫째가 잠깐 혼자 놀고 둘째가 곤히 잠든 잠깐 사이 아내와 허겁지겁 이른 저녁을 먹었다. 아내는 두 아이를 뱃속에 품은 순간 신체적인 측면부터 많은 것들이 변하다 보니 두 아이의 존재가 엄청 크게 다가오는데, 아빠인 나에게는 어떻게 다가오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다 아내가 얹은 질문이었다.


두 아이가 우리를 찾아온 것이 아빠인 나에게도 '행복'인지 말이다.


육아휴직을 하고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바쁜 육아의 일상 속에 가끔씩이나마 아이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순간들이 있다. 아이들의 예쁜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내가 이 예쁜 아이들의 아빠라니'라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아내의 물음에 이것이 '행복'인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응. 찬란하게 행복해."


결혼 전에도 행복한 편이었다. 부잣집까진 아니어도 내가 부족하지 않게 자랄 만큼 성실하고 열심히 사셨던 부모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셨다. 한 동네에서 오래 살았던 덕인지 유년 시절 좋은 이웃과 친구들을 많이 만나 내내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또한, '내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을 그 자체로 존중해 주신 부모님 덕에 여러 운동과 악기 등 취미생활도 많이 하고 그 시절 흔치 않던 해외여행도 많이 다녔고, 그 덕에 대학 진학 후에도 이런저런 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소중한 추억들을 많이 쌓았다. 그리고, 대학원에서 예쁘고 착한 아내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도 했다.


외람되지만, 청년 시절에 스스로 보더라도 행복한 삶을 살았다. 누구나 그렇듯 그 사이사이 나름의 아픔과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 청년 시절의 큰 기둥은 행복이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육아, 찬란하게 행복한 순간들


그런 나에게 있어, 두 아이를 키우는 지금은 '찬란하리만큼 행복'한 순간들이다. 청년 시절, 안정적이고 행복했던 그 모든 시간들이 상대적으로 어두운 밤처럼 느껴질 정도로. 꿀떡이와 찰떡이, 이 두 아이와 복작대며 함께하는 지금의 일상들은 그렇게 찬란하리만큼 행복하다. 그만큼, 두 아이는 그 존재 자체로 내게 '찬란한 행복'이 된 것이다.


잠시 생각하다 덤덤히 말하던 내 대답을 듣고 갑작스레 눈물이 터진 아내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연애하던 그 행복했던 시간들, 그리고 우리가 만나기 전 각자 나름대로 살아오며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순간들까지도 흐릿하게 느껴질 만큼, 두 아이의 존재가 너무 소중하고 크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연애 시절을 이야기하며, 꿀떡이와 찰떡이가 그때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 어색하다며 웃곤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우리가 신혼여행 때 첫째 꿀떡이를 누구한테 맡겨놨었지?' 하며 웃곤 했다.


그런데 막상 신혼 무렵 한강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그림자도 신이 나 보임


육아의 힘듦이 덮을 수 없는 것, 육아의 행복


물론, 육아는 힘들다.


첫째 때도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둘째를 낳고 보니 두 아이 육아는 더 힘들다. 첫째가 조금씩 둘째의 존재를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아직도 많이 예민한 상태다. 오늘만 해도 낮잠을 건너뛰었고, 밤잠도 끝까지 안 자려고 버티다 울부짖으며 겨우 잠들었다. 신생아인 둘째도 전반적으로 건강하지만 간간히 배앓이나 태열로 울고 보채는 빈도가 잦다.


무엇보다, 첫째가 신생아였을 때는 아이 하나 어른 둘이었으니 아이가 울면 당황스럽긴 해도 온전히 달래고 챙겨줄 수 있었는데, 둘째가 신생아인 지금은 아직 첫째도 아기라 둘째 달래랴 첫째 눈치 보랴 정신이 없다. 예를 들어, 밤에 둘째가 배앓이로 울기 시작하면 간신히 잠든 첫째가 잠에서 깰 걱정에 서둘러 둘째를 안고 서재방에 들어가 달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둘째는 더 서럽다는 듯이 크게 울어댄다. 결국, 첫째가 둘째 울음소리에 깨서 울고 둘째도 계속 울며 온 집안이 5.1 채널 서라운드 울음 스피커가 되곤 한다.


오늘만 해도 꽉 찬 하루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급히 아침을 먹고 둘째 엉덩이를 닦고 기저귀를 간 후 바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재활용 분리수거를 준비한 후 부엌과 거실을 정리하고 다시 둘째 엉덩이를 닦고 기저귀를 간 후 첫째와 그림을 그리며 놀다가 에어컨 필터 택배가 도착해서 거실과 방에 각각 있는 에어컨들의 필터를 교체하고 첫째와 버스를 타고 치과에 가서 영유아 검진을 마친 후 집에 돌아와 첫째 엉덩이를 닦고 기저귀를 간 후  첫째와 점심을 먹고 동화책을 읽다가 다시 둘째 엉덩이를 닦고 기저귀를 간 후 첫째와 놀이터에 나가서 그네, 시소, 미끄럼틀, 철봉, 계단 오르기를 1시간 가까이 반복한 후 집에 돌아와 첫째 엉덩이를 닦고 기저귀를 간 후 아내와 급히 저녁을 먹고 첫째와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간신히 재우자마자 배고프다며 보채는 둘째를 달래고 분유를 먹인 후 트림을 시켜 눕히고 나니 '아기 상어 아니야!'라는 소리와 함께 깬 첫째를 달래며 다시 재우고 나서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내 일상이지만 이게 뭔가 싶긴 하다. 하지만 현실이다. 두 아이 육아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아는 행복하다. 만 번을 다시 돌아가도 꿀떡이와 찰떡이를 만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 번을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이 두 아이를 만나 지금처럼 키우고 싶다. 당연히 힘들고 가끔은 체력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곤 해도, 육아의 '힘듦'이 두 아이의 존재의 '찬란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육아의 힘든 순간순간들은 땅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들에 불과하고 이 두 아이의 존재는 청량하고 맑은 하늘과도 같아서, 아무리 땅에 돌이 많아 발바닥 좀 아파도 이 좋은 날씨를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내게 아이를 키우는 것은 그렇다. 땅바닥에 돌멩이 좀 있다고 이 좋은 날씨가 바뀌겠는가. 육아의 행복이란, 육아의 힘듦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두번의 여름, 그리고 겨울 동안 2인 가족에서 4인 가족이 된 우리


내가 결혼할 즈음에도 각종 매체들에서 저출산이 심각한 문제라며 이야기했고, 당시 주변 지인들도 '육아의 힘듦'에 대해 많이들 알려주었는데, 정작 '육아의 행복'에 대해서는 딱히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아이를 만나고 또 기르다 보니 육아는 힘들지만 더 많이 행복한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새벽에 둘째를 달래느라 잠을 못 자 피곤해도, 첫째가 아침 일찍 '아빠와 같이 아침을 먹어야 한다'며 나를 찾으면 그게 그렇게 좋다. 모두가 곤히 잠든 새벽, 잠에서 깨자마자 배고프다고 빼액 우는 둘째가 원망스럽다가도, 급히 분유를 먹으며 고맙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 뻔뻔함에 웃음이 터지곤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몸은 많이 피곤하고, 벌써 이 글을 쓰는 중간에 첫째에게 두 번이나 불려가 트라이앵글 초크(?)를 당하고 나오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네 가족이 그릴 내일이 더 기대된다.


내일도 이런저런 돌멩이들이 많겠지만, 이 두 아이만 있으면 우리 가족의 날은 맑고 청량할 테니 말이다.



꿀떡아... 너 발목 거는 건 어디서 배운 거니... 아기 상어가 꿈에서 이런 것도 가르쳐주니? (Feat. 트라이앵글 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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