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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천동잠실러 Mar 22. 2023

육아하며 떠올린 성혼선언문

일생동안 고락을 함께한다는 것

2023. 3. 22. ()


'오늘 육아 힘드네.'


어제부터 시작된 피곤이 누적되었을 것이다. 어젯밤부터 새벽 사이, 첫째 꿀떡이가 1시간마다 깼다. 엄마가 본인을 재우고 동생에게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인지 밤에 깊은 잠을 못 든다. 덕에 첫째 본인도 피곤하고 둘째 수유도 적시에 제대로 안되어 아내도 젖몸살이 날까 걱정인데 배고픈 둘째는 예민해지고 나도 잠을 못 자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그렇게 피곤한 몸으로 시작한 오늘. 먹는 것, 기저귀 가는 것, 낮잠 자는 것, 씻는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떼를 쓰는 첫째에게 '소리 지르지 않고' 가르칠 것을 가르치고 달랠 것을 달래다 보니 하루가 금방 갔다. 아내가 표정을 보더니 몸에서 사리가 나올 것 같단다.


사실 육아가 뭐 오늘만 힘든가. 육아는 원래 힘들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엄마가 출산 후 몸을 회복 중이고 모유수유를 하느라 잠을 3시간 이상 자질 못했으니 지금 30분만 더 자는 게 어떠냐는 설득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아빠가 허리가 아파서 너를 안을 수 없으니 집에 가는 5분여의 거리는 걷는 게 어떠냐는 설득 따위도 통하지 않는다.


밤에는 둘째가 배고프다고 소리를 빼액 지르고, 그 소리에 잠에서 깬 첫째는 둘째 말고 본인을 안으라며 떼를 쓴다. 우는 첫째를 달래는 동안 둘째는 왜 젖을 주지 않냐며 더 크고 앙칼지게 운다. 결국 아내는 둘째 수유를 하며 첫째를 안아 재우고, 나는 둘째 수유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 둘째 트림을 시키고 재운다.


쉽게 말하면, 부모는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 가고 씻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잔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들을 기준으로 말하면, 아이들의 욕구를 감당하기 위해서 똑같은 인간인 부모는 참아야 하는 것이 많다.


두 아이를 키우며 내가 경험한 육아는 힘들다.


2시간 동안 울며 보채다 드디어 본인에게 맞는 자세를 찾으시고 깊이 잠드신 둘째 선생님 (Feat. 내 손목 파괴됨)


아내는 더 힘들다.


이렇게 힘든 육아의 현장에서 내가 기댈 유일한 사람은 아내뿐이다. 내가 회사를 다닐 때에도 아내는 주말마다 내가 아이들을 보는 것을 걱정했다. 이후 내가 육아휴직을 하니 사람이 육아에 너무 매몰되면 안 된다며 내게 가끔 친구들을 만나 외출도 하고 아니면 주기적으로 운동이라도 다니라며 권유하곤 한다.


그런데 사실 아내는 나보다 훨씬 더 힘들다. 지난 10개월 간 둘째를 뱃속에 품은 상태로 첫째 육아를 했던 것도 아내였고, 둘째 출산의 고통을 온전히 혼자 감당한 것도 아내였으며, 눈에 밟히는 첫째를 보기 위해 산후조리원도 고사하고 이틀 만에 집에 와서 성치 않은 몸으로 육아의 현장에 뛰어든 것도 아내였다. 출산 후 겨우 3주가 지난 지금, 아내는 아직도 한창 몸을 회복해야 하는 시기임에도 충분히 쉬지 못하고 있다.  


물론 2주째 매일 출퇴근하시는 산후도우미 이모님도 너무 도움이 되고 있고, 또한 날이 좋으면 첫째를 데리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 등 낮 동안 아내의 육아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첫째에게도 둘째에게도 '엄마'인 아내는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또 달래는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나도 힘들지만 아내는 더 힘들다.


둘째 수유를 마치고 잠시 샌드위치를 먹다가 첫째 울음소리에 급히 끌려들어간 아내의 흔적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떠올린 성혼선언문


오늘 오후, 잘 자고 있는 둘째 찰떡이를 산후도우미 이모님께 맡기고 오랜만에 첫째 꿀떡이를 데리고 아내와 집 근처 편의점에 다녀왔다. 아내는 오랜만의 외출에 신나고, 첫째도 오랜만에 '엄마와의 외출'에 신나 들뜬 모습이 역력했다. 그렇게 이것저것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첫째 꿀떡이 손을 잡고 느릿느릿 올라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떠오른 것이 '성혼선언문'이었다. 불과 3년 전, 결혼식 직전까지 야근을 하던 나는 밤 11시가 다돼서야 퇴근하고 집 근처 PC방에 가서 성혼선언문을 쓰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다양한 성혼선언문 문구들을 보면서 나름 고민을 했는데,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문구가 있었다.


"일생동안 고락을 함께할 부부가 되기를"


결혼식 전날 PC방에서 부랴부랴 작성 후 인쇄해서 가져간 성혼선언문


결혼과 육아, 괴로움과 즐거움을 아우르는 과정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고락'이란 괴로움과 즐거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결혼 당시에는 그저 아내와 내가 함께한다는 것이 좋아서 그 대상이 괴로움이든 즐거움이든 상관없다는 뜻으로 적어내려갔다. 그런데, 짧은 시간 동안 아이를 둘이나 낳고 육아를 하는 지금 다시 '고락'의 속뜻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괴로움과 즐거움이 '아우러진다'는 것이 참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꽤나 적절한 말인 것 같다.


결혼을 해서 두 사람이 한 가정을 꾸리는 것, 그 가정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출산, 그리고 그 태어난 생명이 자라나는 육아까지. 그 모든 과정들에서 수많은 고락이 동시에 다가오는 것이고, 그 어우러짐 속에서 부부인 두 사람의 '함께함'은 그 자체로 엄청난 힘을 가지는 것 같다.


우리 부부만 해도 그렇다. 결혼 전후로 아내와 나는 각자 바쁜 업무로 매우 힘들었다. 간신히 잡은 약속도 한쪽의 급한 업무로 취소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밤늦은 시간까지 근무했다. 그래도 우리는 한쪽이 혼자 잠드는 법이 없었다. 먼저 집에 도착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무조건 거실에서 기다렸고, 그렇기에 다른 한 사람은 최대한 집에 빨리 가고자 노력했다. 주말에는 빈둥대다 느지막한 오후에 집 근처 편의점 나무의자에 앉아 맥주 한 잔 마시며 밖을 구경하곤 했다. 바쁘고 힘들었지만 그 사소함을 함께하는 것이 좋았다.


결혼 후 첫째 꿀떡이가 뱃속에 찾아오고 아내가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도 항상 함께했다. 입학시험도 함께 갔고 첫 수업도 함께 갔으며 마지막 수업도 함께였다. 임신 과정에서 아내가 임신성 당뇨 진단을 받았을 때도 같이 운동하고 같이 식사하고 같이 병원에 갔다. 당뇨 진단을 받던 그 순간의 괴로움은 즐겁지 않았지만, 그 과정들이 지금 우리 부부에게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함께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을 하고, 첫째를 낳고, 또 둘째를 낳아서 키우는 지금까지 다양한 고락이 있었다. 그 어우러짐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부부는 항상 '함께'하고자 노력했고, 그래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년 동안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며 지금껏 나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아이 둘을 낳아 키우는 육아의 현장에서도 우리 부부는 괴로움과 즐거움의 아우러지는 모든 순간들을 '함께' 마주하고 있다.


오늘 오후 첫째 꿀떡이, 아내와 다녀온 편의점 나들이 (Feat. 맛살 어서 내려놔 꿀떡아)


고락을 함께하며


아내와 나는 이제 겨우 만 두 살이 되어 가는 첫째와 신생아인 둘째를 키우는 젊은 부부다.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살아가며 더 많은 즐거움과 괴로움의 아우러짐이 다가올 것이다. 괴로움을 함께 담은 그 어우러짐이 두려울 때도 있지만, 아내와 함께 마주할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어우러짐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은 추억을 쌓아갈 것이고, 그 추억 속에서 더 견고하고 끈끈한 가정을 꾸려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만나 부부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괴로움을 피하고 즐거움만 취하기 위한 관계가 아니라, 괴로움이나 즐거움이나 그 어우러짐까지도 '함께'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가는 것 말이다.


사실 이미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연속된 출산으로 경력이 단절된 아내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나 또한 '아빠 육아휴직'이라는 생소한 제도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다. 또한, 아이가 둘이나 태어나면서 각자의 직장도 또 앞으로의 거주지도 모두 다시 고려해야 하는 쉽지 않은 상황 속에 놓여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두렵지만은 않다. 아내와 내가 '함께'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부부가 두 아이에게 물려줄 재산 같은 것은 없지만, 이 소중한 두 아이가 자라는 모든 과정 속에서 '함께함'의 가치를 보여주고 또 물려주고 싶다. 그렇게 함께하는 가정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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