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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천동잠실러 May 05. 2023

결코 당연하지 않은 오늘의 육아

육아휴직이 끝나면 사무치게 그리울 오늘

2023. 5. 5. (금)


"언제부터 구직을 준비하실 건가요?"


어제 오후쯤이었다. 첫째 꿀떡이와 병원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마침 이것저것 주문해 둔 것들이 많아 기대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헤드헌팅 회사에서 온 연락이었다. 내 이력 상 지원해 볼 좋은 자리가 있으니 이력서를 준비해서 달라는 것이었다.


나: 전화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제가 지금 육아휴직 중이라서요.

헤드헌터: 아...육아휴직이요? 언제부터요?

나: 네. 4개월째 육아휴직 중이거든요. 남은 기간이 아직 많아서 저는 해당사항이 없을 것 같습니다.

헤드헌터: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언제부터 구직을 준비하실 예정이신가요?

나:..... 네?


이직도 아니고 '구직'이라니. 헤드헌터 분께서는 내가 회사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신 듯했다. 아니면 회사에서 나를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가. 문득 내가 육아휴직을 신청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무슨 남자가 1년씩이나 쉬어?' '이직하려고?' 등등.


그런데 이 짧은 전화 한 통이 나로 하여금 '육아휴직이 영원하지 않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우리 아빠 회사로 못 돌아가나요? (심각)'



'아이와 목욕 약속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저녁에 첫째 꿀떡이와 목욕을 하는데 꿀떡이가 "아빠랑 첨벙첨벙하는 거 재밌어"라며 "첨벙첨벙해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오후에 받은 전화로 마음이 복잡해서였는지 괜스레 마음이 찡했다. "아빠도 첨벙첨벙 재밌어! 아빠랑 또 첨벙첨벙하자!"라고 대답하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복직을 하고 나서도 아이와 지금처럼 자주 목욕할 수 있을까? 아니 더 정확히는, 바쁜 회사의 일상 중에도 '일찍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이와 중요한 약속(첨벙첨벙)이 있어서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휴직이 끝나고 나서도 아이들과의 이런저런 약속들을 지킬 수 있을까? 어찌 보면 사소한 약속들일 텐데 말이다. '저녁에 아빠랑 목욕하자', '이번 주말에는 아빠랑 놀러 가자'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약속들을 지키는 것이 왠지 어려울 것만 같아 마음이 슬펐다. 휴직 전에 나는 퇴근 10분 전에 갑자기 잡히는 회의에 참석해야 했고, 금요일 저녁에도 주말 회의가 잡히는 통에 연애 때도 여러 번 아내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저녁 7시에 회의를 잡기에 '너무한 거 아니냐'며 항의했더니 '그렇게 싫으시면 변호사님이 대표이사님께 일하기 싫다고 말하세요'라는 말도 들었다는 (토씨 하나 안 빼놓고 저렇게 얘기했다). 아. 글을 쓰다 보니 다시 PTSD가 온다.


아이와 목욕을 하는 순간이 새삼 소중하게 다가왔다. 당연해 보이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은 순간이기에.


목욕을 좋아하는 꿀떡이를 위해 산 유아용 욕조. 작아 보여도 꽤 크고 무거워서 목욕은 항상 아빠랑만 했다.



결코 당연하지 않은 오늘, 육아의 일상


육아의 일상이 쉽다고 할 수는 없겠다.

육아휴직을 하고 3주가 지나 쓴 글에서 나는 "육아의 단조로우면서도 다채로운 일상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지금 생각하니 조금 웃기기도 하다. 푸훗. 겨우 3주? 아직 둘째도 없이 애 하나 보면서?

글을 쓴 지 4개월이 지난 지금을 얘기하자면, 일단 육아의 단조로우면서 다채로운 일상은 힘들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눈물 스윽). 특히 아이가 하나에서 둘이 되니 단조로움과 다채로움이 모두 강화된 느낌이다. 단조로운 집안일은 더 많아지고 다채로운 사건사고도 더 많아진 느낌이랄까.


쉽지 않지만 너무나 소중한 육아의 일상

오늘만 하더라도 아침부터 꿀떡이 기저귀가 새는 통에 눈도 못 뜬 채로 매트리스 커버를 세탁해야 했고, 그렇게 정신없이 일어나 아이 기저귀를 갈고 아침을 준비해서 먹이고 나서야 본격적인 일상(이라고 쓰고 집안일과 육아라고 읽는다)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틈틈이 집안일을 하며 첫째와 놀고 둘째를 안아 재우다 보면 내가 씻거나 쉴 시간은 없다. 그나마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첫째와 둘째가 동시에 낮잠과 밤잠에 들어서 이렇게 글을 쓸 짬(?)이 났으니 정말 운 좋은 날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은 정말 컴퓨터를 켤 새가 없었으니.


'하. 쉽지 않네'라고 생각으로 지쳐가던 찰나, 헤드헌팅 회사에서 온 전화 한 통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었다. 육아를 하는 오늘의 일상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우리 네 가족이서 온전히 함께할 수 있는 너무나 소중한 순간들이었던 것이다.


아내가 꿀떡이를 재우러 들어간 사이 어두운 거실에서 둘째 찰떡이를 트림시키며 안아 재우던 순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씨익 웃어주는 꿀떡이의 얼굴, 그리고 두 아이가 함께 잠든 정적 속에서 아내와 빗소리를 들으며 나란히 누워 카톡으로 대화하던 오늘 오후 잠깐의 순간까지. 지금 당장 몸은 지치고 힘들지만 언젠가는 사무치게 그리울 순간들이었다.


육아휴직을 한 지금, 흘러가는 매 순간들이 새삼 너무 소중하고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반복되기에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결코 당연하지 않은 일상들이었다. 일을 할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꿈만 같은 순간들인 것이다.


오늘 오후 두 아이가 동시에 잠에 들면서 비로소 우리 부부에게도 정적이 찾아왔다 (Feat. 쌓인 집안일)



매일, 매 순간을 온전히 감사함으로


아내의 두 번째 육아휴직이 끝나간다. 아마 늦어도 다음 달부터는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서 아내와 진지하게 논의를 해보아야 할 것이다. 아내의 복직 시기, 나의 복직 시기 (또는 육아휴직의 연장), 첫째의 어린이집 등원 여부 등등, 고려해야 할 것도 결정해야 할 것도 많은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머리는 좀 아프지만 딱히 두려운 것은 없다. 아내와 나는 지금까지도 여러 어려운 결정들을 내려왔고 그때마다 함께 논의하고 고민하며 우리만의 길을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이 어떤 길이든 나는 아내를, 아내는 나를 사랑하며 우리를 찾아와 준 이 두 아이를 있는 힘껏 사랑할 것이다.


미래에 대한 고민과 결정과는 별개로, 매일 아침 주어지는 육아의 일상을 충분히 그리고 온전히 누리고자 한다. 아내 그리고 두 아이와 함께하는 이 순간들은 그 자체로 넘치게 감사한 순간들이고, 결코 당연하지 않은 순간들이니 말이다.


요즘 찰떡이만 보면 간지럽히는 꿀떡이, 그리고 비 오는 어린이날을 맞이해서 파전을 먹던 점심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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