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봉천동잠실러 May 29. 2023

집에서 애나 본 오늘

애나 보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2023. 5. 29. (월)


오늘이 휴일이었구나


오늘이 공휴일이라는 걸 아침에 소아과에 다녀와서야 알았다. 이른바 '오픈런'을 위해 아침 8시 30분에 도착한 소아과에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던 것이다. 회사에 다닐 때는 누구보다 예민하게 외우고 있던 공휴일이었는데 이젠 인지조차 못하고 있다. 애들이 휴일이라고 부모를 봐주진 않으니.



집에서 애나 보기


첫째 꿀떡이가 아픈 요즘은 '집에서 애나 본다'라는 그대로 집에서 애나 보고 있다. 나의 하루는 오전 7시~8시 사이에 시작해서 오후 9시~10시 즈음에 끝난다. 글을 쓰는 지금은 오후 3시 반. 벌써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다.


집에서 애나 본다는 것이 뭐길래? 오늘의 기억을 빠르게 더듬어 보았다.


주의: 마침 동시에 잠든 두 아이가 깨기 전에 급히 쓴 글이므로 두서가 매우 없을 수 있음.


오전 7시 50분: 아이들 기상


잠에서 깬 첫째의 열이 38.3도. 일단 해열제를 먹이고 옷을 입혀서 소아과에 갈 준비를 한다. 비몽사몽일 때는 그나마 말을 잘 듣는데 가끔 기분이 안 좋게 잠에서 깨면 모든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옷도 싫어 약도 싫어 아빠도 엄마도 싫어).


오늘은 다행히 짜증을 덜 냈다. 소아과 오픈런을 위해서는 아침을 따로 차려 먹을 시간이 없으므로, 외출 가방을 쌀 때 간단한 빵과 음료를 같이 챙긴다. 외출 가방에는 기저귀, 소독 티슈, 물티슈 등 필수용품들이 들어있어야 한다. 그렇게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다른 손에는 가방을 들고 차로 향한다.


그런데 첫째가 카시트를 타기 싫다고 한다. 왜일까. 저번에 조수석에 태워서 잠시 논 적이 있는데 그 때문인 것 같다. 카시트 말고 조수석에 타고 싶다고 한다. 한참을 설득하다가 명작동화 유튜브를 들려주면서 간신히 제압했다. 카시트에 태우기만 했는데 출발하는 내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오전 8시 30분: 소아과


오픈런을 했음에도 1시간을 기다려 진료를 봤다. 의자에서 기다리는데 꿀떡이가 배가 고프다고 한다. '그래. 당연히 배가 고프겠지.' 외출 가방에서 소독티슈를 꺼내 손을 꼼꼼히 닦인 후 준비한 빵을 건네주니 냠냠 잘 먹는다. 보리차를 먹고 싶다고 해서 빨대를 꽂아 주니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뀌었는지 싫다고 한다. 나중에 갑자기 마실 수도 있어서 계속 들고 다녔다. 결국 먹지도 못하고 버렸다.


정신없이 진료를 보고 수납을 마친 후 약국에 갔다. 약을 다 받고 집에 가려는데 집에 가기 싫단다. 이유는 없다. 그냥 약국에 있고 싶다고 한다. 그렇게 약국에 앉아서 5분을 기다렸다. 엄마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애걸복걸해서 간신히 약국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주차장에 갔는데 이번엔 차에 타기 싫다고 떼를 쓴다. 하.. 반복되는 이 상황은 익숙한데 이 빡치는 감정이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어떻게든 달래야 한다. 뽀로로 비타민이든 전래동화 유튜브든 뭐든 빨리 차에 태워서 집에 가야 점심을 먹고 약을 먹을 수 있다. 그렇게 약국에서 주신 뽀로로 비타민을 물려주고서야 집으로 향한다.


저 아까운 요미요미 보리차..ㅠㅠ


오전 11시: 집에 도착


집에 돌아오니 11시가 되었다. 점심을 준비할 시간이 빠듯하다. 첫째 점심을 준비하려 하는데 이젠 둘째 찰떡이가 운다. 그리고 둘째가 우는 것을 보고 혼자 놀던 첫째도 내 손을 잡고 함께 놀자고 한다.


결국 아내가 둘째 수유를 하는 사이 나는 첫째와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그렇게 아내가 수유를 끝내고 내가 둘째를 건네받아 트림을 시키고, 아내는 점심을 차린다. 그런데 첫째가 본인도 놀아달라고 다시 운다. 나도 울고 싶지만 트림을 어느 정도 끝낸 둘째를 잠시 내려놓고 첫째와 다시 책을 읽는다.


분명 변기 들고 혼자 잘 놀고 있었는데... 둘째만 안으면 놀아달라고 하는 첫째


오전 11시 50분: 점심 식사


아내가 정성스레 준비한 국과 음식들을 첫째 꿀떡이가 반은 입에, 반은 바닥에 버린다. 아직 젓가락질이나 수저/포크질이 익숙하지 않기에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밥을 잘 먹던 꿀떡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몸이 아파서 예민하기도 하고 낮잠을 자고 싶은 것일 테다.  


결국 첫째는 아내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고 나 혼자 밥을 먹는다. 여유 있는 식사? 그런 건 없다. 혼자 놀고 있는 둘째가 언제 울어재낄지 모르니 서둘러 먹고 식탁을 치운다. 아이가 바닥과 식탁에 흘린 음식들을 닦고, 식기들을 애벌세척해서 식기세척기에 넣고 식기세척기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은 설거지를 한다.


부엌을 정리하고 고개를 돌리니 분명 깨끗했던 거실이 엉망이다. 일단 진정하자. 첫째가 다시 나올 수도 있으니 거실 정리는 첫째가 잠든 후에 해야 안전하다. 그리고 실제로 첫째는 다시 나왔다.


아내와 안방에 들어가서 낮잠을 자려던 첫째는 '아빠를 보고 싶다'며 다시 나왔다. 첫째를 안아주며 자연스럽게 약을 먹자고 했다. 그런데 약을 먹기 싫다며 베란다로 뛰어 나간다. 씨익 웃는 것을 보니 장난을 치는 것 같다. 나는 할 일이 태산인데. 하지만 뭣이 중하겠는가. 그렇게 아이와 5분 정도 실랑이를 하며 간신히 약을 먹였다.


자 이제 약도 먹였으니 본격적으로 집안일을 해야 한다. 신생아 둘째가 있는 우리 집은 '감염 방지'를 위해서라도 첫째가 아플 때는 빨래나 살균에 신경을 써야 한다. 첫째 빨래와 둘째 빨래를 세탁기 위아래에 각각 돌리고, 역류방지쿠션과 포대기 모두 스타일러에 살균한다. 빨래가 끝나는 대로 건조기도 돌리고 원래 건조기에 있던 첫째 빨래는 빨리 개서 서랍에 넣어놓아야 한다 (아니면 첫째가 다시 뒤집어엎어놓을 수 있다).


장난감 소독도 해야 한다. 요즘 비가 많이 왔는데 첫째가 베란다에 장난감을 계속 가지고 가는 바람에 빗물에 때가 많이 묻었다. 플라스틱 장난감들을 다 분리해서 구연산을 푼 물에 닦고 하나하나 세척해서 건조해야 한다. 빨리 하지 않으면 분명 첫째 꿀떡이가 방해할 것이기 때문에 속도가 생명이다. 그런데 결국 건조하던 중에 가지고 놀고 싶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덕분에 지쳐서 낮잠을 잘 자긴 했지만.



숨만 쉬어도 쌓이고 부메랑처럼 계속 돌아오는 집안일들


오후 3시-4시: 낮잠 시간


글을 쓰기 시작한 시간은 오후 3시 30분. 첫째와 둘째가 함께 잠든 운 좋은 날이라 가능했다.


오후 3시 즈음까지 우리 집에서는 세탁기가 3번 돌아가고 건조기가 2번째 돌아가고 있으며 역류방지쿠션과 외출용 포대기를 위해 스타일러 살균이 1번 돌아갔다. 플라스틱 장난감들은 다 구연산으로 닦여서 베란다에 널린 채 햇볕에 건조되고 있다. 음식 범벅이었던 식탁도 닦았고 식기들도 애벌세척을 해서 식기세척기에서 돌아가고 있다. 첫째 빨래도 다 개었고 이제 아내가 나오면 서랍에 분류해서 정리만 하면 된다. 일반 쓰레기도 모아서 다 버렸고 거실 장난감도 싹 정리했다.


이제 뭐 하냐고? 첫째가 깨면 인사하고 안아준 후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한다. 저녁식사를 하고 또 오전과 같은 일상이 반복될 것이다. 아이는 또 거실을 어지르면서 성장할 것이고 아내와 나는 다시 그 모든 것들을 수습하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잠에 들 것이다.


아. 참고로, 두 아이들의 기저귀를 갈고 엉덩이 닦고 안아서 달래고 재우는 등의 것들은 너무 자주 해야 해서 적지도 못했다. 위에서 적은 일상들 사이사이에 틈틈이 해야 하는 것들이므로...



애나 본다는 것

'애나 본다'는 말엔 육아와 집안일에 대한 비하의 느낌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애'나'라는 표현이 더 그렇다. '별 것도 아닌 일', '사소한 일',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다. 내가 5개월만 해봐도 혼자 애를 본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단순히 집안일만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애가 있는 집에서는 하나하나가 더 어렵다. 아이를 안전하게 돌보고 때에 맞게 성장하도록 밥을 먹이고 재우면서 집안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걸 혼자 한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못한다.


이 글만 하더라도 '애를 보는 것'의 극히 일부분이다. 아이별로 시기에 따라 해야 하는 예방접종, 영유아 검진, 치아 검진, 배변 훈련, 피부 관리, 알레르기 관리, 목욕 등을 포함해서 에어컨/비데/공기청정기 필터 청소 및 교체, 이빨 닦기, 소변이나 대변이 샜을 때 매트리스 관리 (방수포+커버 세탁 등), 재질별 장난감 관리, 옷 관리, 발달 사항 관리 (언어 등), 음식 관리, 냉장고 관리, 카시트 관리 등도 누군가가 해야 한다.


'애를 보는 것'을 사소한 일이라거나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무식한 일이다. 경험해보지 않은 일을 함부로 사소하다거나 어렵지 않다고 하는 것이니 무례한 일이기도 하다. 한 생명을 키워내는 모든 과정을 '애를 본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모를지언정 그 숭고함까지 외면해서는 안된다.


'애나 본다?' 적어도 애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입에 담지도 말아야 하는 말이다.


글을 쓰는 도중에 잠에서 깨서 안아달라고 운 찰떡이 (뀨?)
그리고 엄청난 기침을 하며 연달아 일어난 첫째 꿀떡이 (Feat. 긴 밤 예약이요)


매거진의 이전글 육아휴직 후 다섯 달이 지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