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영도다리추억색
부산은 로컬스케일로 아기자기한 특징이 많이 담긴 사랑스러운 도시이다.
작지만 크고, 멀다고 생각되지만 가까운, 거창하진 않지만 다리를 건너면 새로운 세상들이 펼쳐지는 재미있는 도시이다.
특히 영도는, 한국전쟁 때 피난민이 부산으로 몰리면서 문학가, 화가, 음악가 등 예술인들의 집합체가 되었다.
영도 목장원에는 '목장의 섬'이라는 뜻의 마키노시마(牧ノ島)[목도]라고 불렀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소를 키우던 목장에서 시작되었는데 더 오래전에는 중국과 일본으로 전쟁에 나가는 제일 중요한 말을 보관하는 장소로 목장원에서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그래서 창의성 넘치는 공간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말 안 듣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제일 많이 했던 말은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말 안 들으면 다시 영도다리 밑에 도로 갖다 버려야겠다"였다. 물론 나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 아이들은 상처를 받았지만 부모님의 사랑에 다시금 감사를 느끼며 말을 잘 들으려고 노력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 당시 영도다리는 '이산가족 만남의 장소', '피란 추억을 담은 애환의 다리'라는 의미를 지닌 일종의 유행어였던 것 같다.
1966년 영도 다리의 철 구조물에 부식방지(방정)를 위해 붉은색 페인트를 칠했는데, 붉은색 영도다리는 상징적인 색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2003년 영도다리가 재개통이 되면서 부산의 해양 도시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푸른색일 때도 있었지만 다시 부산항과 도시의 랜드마크 색상으로 47년 만에 도개기능을 회복하면서 새로 옷을 입었다. 그래서 햇빛에 약간 빛바랜 붉은색에 해양도시 바다, 영도하늘의 색으로 2색 배색을 해 보았다.
그 당시 영도 다리의 색상을 부산시와 관련 기관, 전문가들이 모여 정했을 것이다. 지금 역사를 되돌아보니 전쟁시절 피눈물로 그리운 열정색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피난민들을 받아들인다고 힘들었지만 그 누구 하나 칭찬해 주는 사람 없고, 힘 빠진 색 바랜 도시 마냥 아무 색이 없다가 눈에 띄게 옷을 입었다.
영도다리의 시공회사는 토목계의 거두로 알려진 오바야시구미가 맡았고 기계시설 부문은 오사카 기차회사가 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술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본의 기차기술을 빌려야 했다. 설계를 맡은 야마모오 우타로는 나고야공고를 거쳐 미국 유학을 마친 40대 초반의 엘리트였으나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개통을 보지 못했다. 보조설계는 통영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건축가 최규용 씨가 담당했다. 4년의 공사 끝에 준공식 때는 다리의 장수기원을 위해 김해에 살고 있던 80대 장수 부부와 쓰치야 덱사큐 부산시장이 테이프 컷팅식에 참석하였다.
1934년 개통 당시보다 2개 차로가 더 늘었고 공사비만 1천100억 원이 들었다고 한다. 국내 유일 동양 최대 규모의 일엽식(한쪽만 들어 올려지는) 교량이다. 도개 부분은 1천1t급 배가 다리 밑을 지날 수 있도록 2분여 만에 75도 각도로 세워진다. 새 영도대교는 길이 214.8m, 너비 25.3m, 6차로 규모이다.
도개 부분은 1천 t급 배가 다리 밑을 지날 수 있도록 2분여 만에 75도 각도로 세워진다.
영도다리를 기점으로 근대사에 큰 아픔이 있었던 영도의 역사를 알고 있는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과 미국과의 다양한 교류를 위하여 영도의 앞바다 부산항에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영도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영도인 섬에서 나룻배를 타고 육지로 나와야 했다. 나룻배 이용객이 한창때에는 하루 5만 명 이상이 되었다. 이용객이 늘어나면서 부산과 영도를 잇는 다리를 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영도다리의 계획과 함께 투자비가 마련되었다.
마을과 도시는 먼저 교통이 발달되어야 한다. 그 당시에는 배 시간에 맞춰 약속이 정해지고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계획되었다. 다리건설로 나룻배가 없어진 지 90년 후에 이번에는 관광용 도선이 다시 부활했다. 도선 출발지였던 영도 선착지에서 유람선을 타면 자갈치 시장, 원양어선과 냉동창고, 조선소 수리공장, 깡깡이 예술마을, 흰여울 마을 등을 구경할 수 있다.
일제는 1926년부터 구체적으로 영도다리 건설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6년 간의 공사를 거쳐 1934년 11월 23일 영도다리를 준공, 개통한다.
길이 214.6m, 폭 18.3m, 높이 7.2m 규모로 고정교가 길이 153m, 도개교가 길이 31.3m, 너비 18m였고, 육교가 길이 15.09m였다. 도개교란 돛이나 굴뚝이 높은 큰 배가 다리에 걸리지 않고 그 밑으로 운항할 수 있도록 상판을 들어주는 기능을 가진 교량을 말한다. 도개교 부분은 최고 80도까지 들어 올려졌고 저속으로 올릴 때 4분, 고속으로 올리면 1분 30초 만에 완전히 들어 올려졌다.
난 영도에서 자랐다. 초, 중, 고를 거쳐 33년을 살다가 결혼을 하면서 영도 심신할머니의 품에서 벗어났다.
영도에서 사업을 시작하면 삼신할머니가 계속 지켜주고, 봉래산(옛, 고갈산)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사를 가야 실패를 하지 않는다는 썰이 있다. 다행히 사업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삼신할머니의 해코지를 당하지 않고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교통의 발전과 집들의 발전, 다양한 문화, 예술의 도시로 인정받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다.
그중에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법정 문화도시로 선정되어 공공예술 프로젝트로 기획된 영도가 발전 중에 있다. 쓰레기 섬을 재건해 자연과 예술의 섬으로 변화시킨 일본의 나오시나 섬처럼 예술을 통해 영도를 알리고 관광지로 발전시킬 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영도문화도시센터가 생기면서 '사람-자연-역사가 문화로 이어지는 예술과 도시의 섬, 영도'라는 콘셉트로 1차 문화도시 실행집단으로 영도를 잘 가꾸고 있다. 영도 폰트도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아 많이 활용되고 있다. 2023 문화도시 조상사업에서 최우수 도시로 선정되는 쾌거도 거두었다.
이런 지속가능한 관심과 노력을 더하여 소멸지역에 손꼽히던 영도인데, 관광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한진중공업의 해양 조선업은 점점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커피문화, 공간재생, 워케이션 등의 새로운 문화, 예술로써의 마을로 점점 다듬어지고 있는 과정이다. 사람의 노력이 없이는 지속가능이란 어렵다.
지금도 미래가 궁금해서 점을 보고, 타로카드를 보고 두려움을 해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스로마신화를 보더라도 "신탁"이라는 신의 수호신에 상당히 많은 지도자, 신들, 사람들이 의지를 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빠질 수 없고, 영도 당산 할매의 예언 등도 빠질 수 없는 옛사람들의 두려움을 달래는 방법이다. 영도다리 밑에도 피난시절에는 경제활동을 위한 점집, 진정 신탁을 받아 점을 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보수화가 되면서 구포 등 각 지역에 번져서 여기저기 신들을 모시고 있는 곳이 있지만 결국 내가 희망하는 믿음은 내 마음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눈물에 젖어 희망바람으로 살아가던 때에
영도다리만 있어도 감사했는데 지금은,
중앙동과 이어지는 부산대교, 해운대와 이어지는 부산항 대교, 송도와 천마터널로 이어지는 남항대교로
더 이상의 섬이 아니다. 많은 관광객이 몰려오는 꿈의 도시가 되고 있다.
글로벌 허브도시로 가는 길들이 완성된 것 같다.
만남의 광장, 점집의 위로,
힘들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한때는 자살다리라고도 불렀던,
힘이 되었던, 지금도 힘이 되고 있는 영도다리.
영도 삼신할매에게 부탁해 본다.
최초의 다리를 지켜달라고... 우리의 네트워크의 소중한 역사라고...
뜨거운 여름,
영도를 방문한다면 꼭 영도의 역사도 함께 즐겨보시길 바란다.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날씨에 따라서도, 시간대에 따라서도 많은 색이 교차된다.
역사 속의 나,
현재의 나,
오늘의 나는 무슨 색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