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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낮잠 Feb 21. 2018

기록

2월

0208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 여섯 시 십오 분 M은 나를 빤히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녀는 정확히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만약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내게 아주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해줄 것 만 같았다. 보물의 위치라던가,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 같은

눈과 눈을 맞춘 채 꽤 긴 시간 동안 멈춰있는 것은 우리가 만난 이후 거의 처음이었는데 에메랄드 빛과 노오란 호박색이 섞인 M의 눈동자를 집중해서 들여다보고 있으니 세상 모든 것이 멈춰버린 느낌이었다.

말은 없고 그저 뚫어져라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낯선 태도 때문에 나는 기분이 묘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바라만 보다가 연단위로 시간이 흘러버리면 어떨까 싶었다.


0211

남들 다하는 결혼 준비를 별 기대와 감흥 없이 몇 시간 만에 결정해버리고

예식장을 계약하고 온 날 가로등 아래로 눈이 내렸다.


0216

들고 다니던 노트를 잃어버렸다. 꽤 큼지막해서 웬만하여서는 잃어버릴 일이 없다고 생각했고 맨 뒷장에 이름과 핸드폰 번호까지 적어두었는데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연초라 괜찮아'라고 했지만 생각도 계획도 마음도 모조리 잃어버린 느낌이다. 사실 막상 찾으면 별 내용이 적혀있을 것 같지는 않다.


0221

변화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을까. 내가 원하는 변화는 무엇일까

일은 집중도 안되고 의지도 없다. 휴가를 앞두었지만 아무 생각이 없다. 붕붕 그냥 윙윙

그냥 모든 것을 없던 일처럼. 태어난 적도 없다는 듯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

결정해야만 하는 수많은 문제들 아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심보선의 시를 한번 더 떠올려 보는 것. 내가 결정해버린 문제들에 대해서는 의심도 오해도 없었으면 좋겠지만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이 무거움을 어찌할까.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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