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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낮잠 Aug 16. 2018

서른의 여름

through the sun

울컥할 만큼 쨍-하게 들리던 매미 울음소리가 조금씩 야위어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이렇게 여름이 지나가고 있구나, 내년은 어쩌면 이보다 더 뜨거운 여름이 올까, 가을, 겨울이 지나면 나는 서른하나가 되는구나. 


하루는 계획 없이 휴가를 내고 낯선 시간의 익숙한 공간에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존재하지 않을 세계라고 생각하니 마치 유령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고 오랜만에 홀로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 같아 설레기도 했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한적한 거리와 텅 빈 공간에서는 잠든 고양이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카페에서 우연히 펼친 책에서는 알 수 없이 그리운 냄새가 났다. 그리하여 나는 나를 위한 약간의 소비를 했고, 편지를 쓰고, 어질러진 것들을 청소했다.


아침부터 계속해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배는 고프지 않았다. 무언가가 충족된 것 같은 또는 자유,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 가능할 수 있다는 느낌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최근에 청첩장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약속을 잡았다. 갈 수 있는 거리임에도 충분히 내지 못했던 시간들에 겹겹이 쌓였던 이야기들은 뒤죽박죽 튀어나왔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은 빠르게 또 제 몫을 해냈다. 인간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각각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다들 어떻게든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오른편으로 아주 예쁜 초승달이 그림같이 떠 있었다. 내 감정은 얌전한 태도로 유지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H를 내 앞에 가져다준 것이 그의 계획일 것이라는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올해 초쯤 여행할 때 찍었던 일회용 카메라 3개를 사진관에 맡겼다. 초점이 맞지 않는, 뿌옇게 흔들린, 말도 안 되는 사진들로 가득하겠지만 기다려지고 또 기대되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어느 섬에서는 건물이 부서질 정도의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고 한다. 누군가는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지 못한 채로 시간만 흐르고 있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확신이 없는 연애가 불안하다고 했다. 누군가는 결혼을 앞두고 딱히 감흥이 없다고 했고 그 누군가의 어머니는 그날 결코 울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나는 아마도 그 섬으로 여행을 가게 될 것 같다.


만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같은 지구에 같은 나라에 잘 살아 있으면서도 그저 추억으로 남게 되는 인연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슴이 찡하게 고마운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행복감이 들었고 더 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은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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