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낮잠 Dec 26. 2018

30의 12월

기억을 기록하기

올해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가장 커다란 사건은 결혼이 될 거고, 나의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것 하나.

두 번째는 언제나 내게 모든 것을 주기만 하던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쓰러지셨고 큰 수술을 하셨다. 오랫동안 많이 아팠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끝도 없이 슬퍼지니 살아있는 모든것들에는 끝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로 한다.

셋째는 우연일지 필연일지 모르겠으나 M의 동생을 데려오게 됐고, 어느 영화에서 따와 이름은 D라고 지었다.

 

일이야 아직까지는 먹고 살만큼 그럭저럭 해내고 있다. 그리고 미루고 미루었던 엄마와 동생과 함께하는 여행을 다녀왔다. 돌아와 떠올려보니 에메랄드색이 배경인 꿈을 꾼 것 같다. 짧은 꿈. 촉촉한 꿈.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만났던 뜨겁게 내리쬐던 태양과(이방인의 태양이 떠오른 만큼), 언제 그랬냐는 듯 핑크색으로 하늘을 물들이며 아래로 사라지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이제 해는 다른 나라로 간 거야?, 하루 종일 전 세계를 여행하는 기분은 어떨까, 하는 대화를 나누었다. 선선한 바람, 명랑한 하늘, 듬성듬성 떠 있는 흰 구름들, 양쪽에 귀여운 나무들이 차례차례 심어져 있는 좁은 시골길을 달리는 것은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리고 이런 풍경을 보며 너무 좋아하다 뒷좌석에서 잠든 엄마를 바라보는 것/ 그게 내게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F

Y가 우리 집에 D와 M을 보러 놀러 왔다. 떡볶이를 사 와서 먹으면서 놀았다. Y는 이제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는 친구는 잘 해낼 것이 분명해 보였다. 시간이 늦어 오빠와 나는 Y를 역까지 데려다주고 로또를 하고 돌아왔다. 치킨 한마리랑 맥주도 사 왔다. 미세먼지가 매우 심한 밤이었다. 짙은 군청색 밤하늘이 아니라 그냥 회색이었다. 흐리멍덩하고 몽롱해 보였다. 이렇게 계속 된다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의 수명이 금세 줄어버릴 것 같았다. 그 로또는 결국 꽝이었지만 따듯한 밤이었다고 기억된다.


S

아마도 집에서 쉬었던 것 같다. 공기가 안 좋아서.

아가들이랑 집에서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영화나 보면서 있었다.

저녁은 냉장고에 있던 것들로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았다.

어느 종교인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요, 용서가 먼저죠.라는 말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세상이 미쳐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면 애초에 미친 세상에 내가 태어난 걸까



S

에버랜드 옆에 있는 호암미술관을 갔다. 평온하고 조용했다.

값비싸 보이는 나무들이 멋스럽게 심어져 있었고, 나있는 길도 깔끔했으며, 건물의 창이나 조명등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모든 것이 예의 바른 느낌이었고 주차장 근처에는 공작이 두 마리 걸어 다니고 있었는데 쨍한 청록색 깃털을 흔들거리며 나를 지나쳐가는 것이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M(크리스마스이브)

얼마 전부터 앞니의 상태가 좀 이상해 보여 큰 맘먹고 덜덜 떨면서 치과를 갔는데 다행히도 문제는 없었다. 걱정 말고 다음에 다시 오라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병원을 뛰쳐나왔다. 낮에 오빠 친구 부부가 놀러 와서 점심은 돼지갈비를 먹었고 우리 집에 와서 커피와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먹었다. 크리스마스가 케이크 먹는 '데이'였나? 싶었다. 여하튼 그들이 사 온 케이크는 아주 맛이 있었다. 그들이 간 후에 M을 데리고 근처 병원에 갔다. 처음으로 병원에서 제대로 건강검진을 하는 거라 내가 다 떨렸다. M은 기관지도 안 좋고, 심장 모양도 정상은 아니라고 했다. 의사는 M의 목 부분에 내 실수로 인해 뭉쳐진 덩어리는 나중에 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여러 번 말했는데 그만 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듣기 싫었다. 예상보다 많이 나온 진료비를 내고 약을 받았다. 비용에 연연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나는 반려 동물을 키울 자격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자책감이 들었다. 한 마리도 버거워하면서 두 마리의 엄마라니. 나는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토요일에 피검사 결과를 확인하러 재방문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슬프게도 멀쩡하던 M이 환자로 보였다. 나를 포함해 죽음으로 가고 있는 모두는 어디든 다 안 아플 수 없고, 다들 죽음으로 가는 열차를 사이좋게 타고 있는 거겠지.


괜히 이제 아플 일만 남은 것 같아서 기분이 계속 우울했다. 나는 이렇게 무거운 일을 간과했다.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어 의사가 추천해준 M에게 필요한 약들을 빠르게 구매했다.

M아, 행복하니? 나를 만나 미안하다.


저녁은 집 근처 참지 집에서 오빠가 사줘서 감사히 먹었다. 가격은 비쌌지만 배가 너무 불러서 만족감이 들었다. 남긴 것은 포장해달라고 했지만, 결국 모두 버렸다.



T(크리스마스)

아침밥은 엄마가 보내주었던 사골국에 알타리 김치, 케첩을 잔뜩 올린 계란 프라이를 먹었다.

점심은 느지막이 중국집에 짜장면 짬뽕 탕수육 세트로 배달시켜 먹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면들은 너무 불어있어서 그냥 그랬다. 집에만 있기 그래서 잠깐 근처 새로 오픈했다는 쇼핑몰에 산책을 하러 갔다. 아무것도 사지 말자고 했지만 결국 우리는 쿠션 커버 2장을 구매했다. 서로 무언가를 사주고 싶어서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었다. 정말로. 사고 싶은 게 없다는 그 기분만으로도 충분했던 크리스마스였다.












작가의 이전글 미드나잇블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