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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주 Feb 25. 2020

차가 식기 전에, 글쓰기

차 내리듯 글을 쓸 수 있다면

이미지 출처 : unsplash.com


나의 노트북 옆에는 언제나 차가 있다. 홍차일 때도 보이차일 때도 커피일 때도 있다. 드물게 허브차를 마시는 날도 있고 결명자차나 녹차를 마시는 날도 있다. 대부분은 홍차나 커피가 함께하지만 올해 들어서는 보이차를 조금씩 더 많이 마시고 있다.


아직도 텅 빈 한글 화면과 마주할 때마다 망설인다. 괜히 인터넷 창을 열어 별 필요 없지만 사고 싶었던 물건을 검색해보기도 하고, 한동안 잊고 있던 책도 괜히 펼쳐본다.      


그리고 차 한 모금.      


아침을 시작하며 마시는 차 한 잔은 참 고마운 것이다. 오늘도 할 일없이 하루를 보낼 것 같다는 두려움을 지워주니까. 한 글자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주니까.     


이미지 출처 : unsplash.com / 사진 속 주전자가 바로 '자사호'이며 이외에도 다양한 모양이 있다.


올해 초에 부모님 집에 놀러 갔다가 보이숙차를 처음 마시게 됐다. 엄마는 요즘 취미로 ‘차’를 배우고 계셨는데, 다구를 사용해 소주잔만 한 조그만 잔에 차를 나눠주셨다. 처음엔 에게? 이만한 잔으로 얼마나 마시려고 그러시나 싶었는데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여러 번 잔을 비우게 되었다. 차를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도 속이 쓰리지 않았고, 마음마저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술에 취하듯 차에 젖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오랜만에 가족과 긴 수다를 나누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당장 작은 다구 세트부터 장만했다. 형편에 맞게 값이 싼 물건들이었지만 차판 위에 놓인 첫 자사호를 보고 있자니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충만했다. 기분에 겁도 없이 부침개만 한 병차도 덜컥 구입해버렸다.     


구입한 첫 보이차는 17년 보이차 숙병으로 357g이 압축된 병차다. 병차란 틀에 눌러 떡 모양으로 만들어서 굳힌 차를 의미한다. 처음에 내려보면 탁한 빛이 느껴지지만 마실수록 소박하고 친근한 차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찻잎을 자사호에 천천히 나누어 내려 마시다가 점차 티포트를 사용하여 데일리로 간편하게 마시게 되었다. 최근에는 자차법이라 하여 주전자에 끓여 마시는 방법으로 하루종일 마시기도 한다. 차를 마시는 방법은 무궁무진한데, 아직은 잘 모른다. 앞으로도 차차 하나씩 알아보며 여기에 기록해둘 생각이다. 무엇보다 매일 편하게 자주 마실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고자 한다.     


이전에도 차를 마셨지만 다양한 차 도구를 사용하여 마시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고, 차를 더욱 즐기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차를 마시느냐에 따라 필요한 다구도 조금씩 달라진다. 형식이란 건 귀찮을 수 있지만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에서는 중요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대학 시절, 교양과목으로 다례를 배웠던 것이 생각났다. 그땐 그 모든 행위가 고리타분하고 허례허식 같았다. 즐기지 못하고 순서를 되는대로 외우기만 했더니 지금 내 몸에 남아있는 기억이라곤 찻잎 하나만큼도 없다. 그랬던 내가 이제 와서 차를 즐기려고 하는 때가 오다니.    


글을 쓰다 막힐 때도 가끔 작법 책이나 글쓰기에 대한 책을 찾아볼 때가 있다. 차도 담는 찻잔에 따라 내리는 방법에 따라 맛도 기분도 다르게 느껴지듯, 창작에도 형식이 필요한 때가 있다. 작가마다 그 형식은 조금씩 달라도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들....


처음부터 잘 쓰려고 하지 말 것.
몇 번이고 고쳐 쓸 것.


이미지 출처 : unsplash.com


차를 마시는 과정도 글쓰기와 다르지 않다.


찻잎에 첫물을 붓는다. 그리고 잠시 후 첫물을 버린다.

버리는 첫물은 마실 컵을 데워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찻잎을 씻어주거나 떫은맛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어쨌거나 첫물은 그 역할을 다 했으니 버린다. 그리고 다시 물을 붓는 것이다.


잠시 후 우린 물을 컵에 부으면 첫 찻잔이 마련된다. 천천히 향을 맡고 첫 모금을 음미한다.

첫 잔만으로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이후 몇 번이고 찻물을 우려낸다.

그 과정에서 몸은 천천히 데워지고 마음은 비워진다.


초고를 몇 번이고 고쳐 쓰는 것처럼, 찻물도 꾸준히 우려 지고 또 우려 진다.

마지막 잔을 비울 때가 되면 더는 바랄 것이 없다. 없어야 한다. 아쉬움은 남을지라도.


차를 조금씩 마시면서 나의 일상은 차 한잔만큼 풍부해졌다. 어떤 차이든 그날의 차는 그날밖에 마실 수 없듯이 이 글도 오늘이 지나면 다르게 보일 것이다.  

    

차를 마시면서 생각한 것은, 차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 지금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언가에 관심을 기울이면 그 대상은 결코 식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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