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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주 Sep 03. 2022

한 달 후

9월이 되자마자 핸드폰 액정이 깨졌다. 오랜만에, 그것도 9년 만에 만난 사람들과의 즐거운 술자리 이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좀 취했던 걸까. 약 3년 동안 한 번도 내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았던 핸드폰이 어느 순간 아스팔트 바닥 위에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들어 핸드폰을 주워 들고 집으로 돌아와 전원을 다시 켜보자 다행히 작동은 되었다. 그러나 금이 간 곳은 손이 많이 가는 부분이라 안전상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급한 대로 카톡과 전화, 인터넷만 작동되면 그만인 저가형 새 핸드폰을 주문했다. 


새 폰을 기다리는 동안, 이전 핸드폰 속 사진첩부터 백업하기로 했다. 3년 간 하드 용량을 빽빽이 채운 내 사진첩에는 드라이브에 옮기기 감당도 안될 만큼 많은 사진과 동영상들이 있었다. 몇몇 사진들은 중복이거나 지워도 상관없는 막 찍은 사진들이었지만, 일일이 지우기엔 시간이 여의치 않아 일단 통째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다 한 폴더에서 나는 잠깐 클릭을 멈추었다.


<나의 친구들>


이 폴더의 절반 이상이 명희 언니와 찍은 사진들이었다. 올해로 꼭 20년. 그동안 한 번도 긴 헤어짐 없이 함께 지내 온 자매 같은 사이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사진 찍는 걸 참 좋아했다.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던 해, 작은 벤처회사에서 동료로 만난 언니와 나는 지금까지 함께 지내왔고, 그때부터 소소한 순간마다 사진을 남겼다. 화소 떨어지는 디카 사진부터 초점이 나간 필름 사진, 지금의 스마트폰 사진까지. 그중 4년 정도는 함께 작업실을 운영했고, 이후 서울에 함께 올라와 5년 이상 함께 자취도 했다. 언니가 결혼한 이후에도 같은 동네에서 지냈고 나 역시 결혼을 하게 되어 타지에 잠시 가 있는 동안에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 함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운 좋게 책도 2권 내게 되었다.(언니와도 종종 이야기했지만, 이건 우리 우정 최고의 결실이었다! - 비록 절판되었을지언정!) 


그렇게 '함께'라는 건 언니와 있는 동안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정말 우리는 모든 순간을 '함께' 보냈으니까. 가장 즐겁고 힘들었던 20대에서 30대까지, 청춘 시절을. 


그제야 한동안 회피해 온 현실이 다시 떠올랐다. 

새 핸드폰에 언니와 찍은 새로운 사진들은 이제 없겠지. 


언니가 하늘나라로 '이민 간' 7월 말부터 나는 조금 정신없이 살았다. (남은 우리는 언니와의 이별을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아마 언니와 내 사이를 아는 지인들이 본다면, 어떻게 저렇게 멀쩡하냐고, 아무렇지 않게 지내느냐고 할 수도 있을 만큼 말이다.


나는 언니의 3일 장이 치러지고 마지막 납골당 안치까지 지켜보고 온 직후에도 원고 마감을 위해 책상 앞에 앉았고, 세 끼 밥을 먹었고, 종종 깨긴 했지만 잠도 잘 잤다. 카페에 가서 맛있는 커피를 마셨고, 외식을 하기도 하고, 영화관에서 영화도 보았다. 가끔 술을 마셔도 언니 생각으로 울지 않았다. 언니와 나의 마지막 카톡 메시지는 언제나처럼 조만간 만나자는 내용이었으니까.


다시 눈물이 난 것은 어느 날 밤, 샤워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스스로도 당황해 얼른 샤워기를 끄고 진정해보려고 했으나 욕실 밖으로 나와 물기가 마르고 나서도 한참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살면서 돌이킬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건 언니의 일이었으니까. 

이제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걸 인정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그간 나는 슬픔을 견뎌낸 것이 아니라 밀어내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언니를 보내고 난 직후, 8월 동안 종종 '결국 나도 맞이할 일에 대해 이렇게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가'라는 오만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생각조차 꿈만 같이 느껴졌다. 때론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아직 핸드폰 연락처 즐겨찾기 가장 위쪽에 자리한 언니의 번호를 눌러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으니까.


나는 과거의 확신들을 후회한다.
너는 물론 애도하고, 이야기로 풀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돌파해야 해.
아직 진정한 슬픔에 익숙하지 않은 자의 우쭐대는 확신이었다.
나는 과거에도 애도해봤지만 이제야 슬픔의 핵심에 닿았다.
이제야 그 가장자리의 작은 구멍들을 더듬거리면서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배운다. 나는 이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다.

최근 읽은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 작가의 '상실에 대하여'에서 가져온 구절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잃었다고 했다. 그녀는 책 한 권을 마무리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해 '과거 시제'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이제 꼭 한 달 후. 나 역시도 그러하다. 슬픔의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용돌이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은 남은 이들의 과제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십 수년 전, 서면 길거리에서 언니와 나의 손금을 봐주시던 할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난다.


"너희는 평~생의 친구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마주 보며 웃던 우리의 모습도.



2022년 7월. 제 평생의 친구이자 종이밴드의 그림작가인 홍양 작가가 하늘 나라로 떠났습니다.

마지막 힘겹고 치열한 암과의 사투 속에서도 수많은 환우 가족분들을 위한 그림을 그리며 끝까지 자신다움을 간직한 채 작가로 살다 간 홍명희 작가의 애도와 명복을 마음으로 빌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2023년, 1월부로 종이밴드의 모든 콘텐츠를 내립니다. 그동안 종이밴드의 컨텐츠들을 읽어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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