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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주 Mar 05. 2024

여행지에서의 카페

작년 여름, 혼자 속초-고성 여행을 갔었다. 즉흥적으로 마음이 움직여 떠난 여행이었다. 장마가 한창 시작되려는 찰나였고, 고속버스에 올랐을 때는 이미 하늘이 잔뜩 흐려져 있었지만 이미 출발했으니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즉흥적인 여행 치고는 2박 3일의 나름 긴 일정이었다. 원래 나였다면 1박 2일이나 당일치기 정도로 짧게 다녀왔을 텐데, 그때는 모든 것이 모호한 상황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때라 생각을 좀 더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었다.


버스는 속초에 먼저 도착했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터미널 근처 물회집을 찾아 점심을 먹었다. 예상했던 정겨운 풍경과 달리 서빙로봇의 안내를 받으며 먹은 물회였지만, 비로소 속초에 왔다는 실감이 왔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바닷가를 조금 걸었다. 바람이 몹시 불었고, 관광객도 거의 보이지 않는 그런 날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땐 바다 앞에서도 바다를 보지 못했다. 마음이 복잡할 땐 어디에 있어도 지옥이라는 말이 맞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옥'정도의 일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시간이 주는 치유일 거다). 나는 갑자기 흐린 하늘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에서 도망치듯 카카오 택시를 불러 미리 검색해 둔 카페로 향했다.


어느 장소에 가든 그 지역 카페 안에 자리를 잡아야 쉬는 것 같다고 느낀 지는 꽤 오래됐다. 도착한 카페는 외관부터 생각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놓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평일 낮이어서인지 손님은 많이 없었고, 대화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고요함 속에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 친절한 미소로 맞아주시는 사장님의 배려에 한층 더 편안해졌다. 나는 차가운 커피를 주문하고, 바깥 골목이 내다보이는 쇼윈도 쪽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저기 식물이 많이 놓인 카페였다. 푸릇푸릇한 화분들 사이로 책장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좋아하는 만화책도 있었고, 에세이, 철학서, 인문서,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사장님의 취향대로 꽂혀 있었다. 다행히 그 취향이 나와도 어딘가 맞는 듯해서 더 마음이 놓였다. 책 한 권을 골라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심플한 유리컵에 담긴 커피 한 잔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한참 테이블 앞에서 책을 보다가 그제야 의자 위에 놓인 내 배낭을 볼 여유가 생겼다. 겨우 2박 3일인데 짐이 너무 많았다. 저걸 이고 지고,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한데 이틀 동안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다시 아득한 기분이었다. 원래 계획이라면 고성에 있는 숙소로 가기 전에 속초의 서점 몇 곳과 시장도 들를 생각이었다. 나는 과감히 일정 중 한 두 곳을 노트에서 지우기로 했다. 미션 완수하듯 계획한 모든 곳을 다 돌아볼 이유는 없었다. 내 여행의 목적은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으니까. 


나는 책을 덮고 여행수첩을 꺼내 그때의 기분을 썼다. 조그맣게 카페 내부 풍경도 그렸다. 나중에 이걸 봤을 때 이 카페와 이 기분이 생각났으면 하고. (여행수첩은 막상 여행을 다녀오면 그대로 서랍 속으로 들어가기 마련이지만)


카페에서 쉬고 나오자 비로소 여행이 시작됐다. 카페 앞에서 골목 사이를 헤매던 나는 곧바로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짐부터 풀어놓고 다음을 생각하기로 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걷다 보면 계획하지 못한 근처 어딘가를 발견할 수도 있고, 그대로 쉬고 싶을 수도 있지만 어떤 방향이든 최선의 선택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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