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휴일, 거실 소파에 할 일 없이 앉아 TV를 켰다. OTT 앱에서 드라마와 영화를 고르는 것조차 귀찮아진 때는 그저 TV에서 방영해 주는 것을 보는 게 좋을 때도 있다. 한참 리모컨과의 실랑이를 벌이다 멈춘 채널에서는 한 때 자주 반복해서 봤던 영화 <카모메 식당>의 한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장면은 핀란드에서 카메모 식당을 개업한 주인공 사치에가 빈 가게를 지키고 있는 모습에서 시작됐다. 그때, 가게 안으로 들어선 (아마도) 핀란드 중년 남성. 그는 사치에의 주방과 카운터를 눈여겨보다가 대뜸 커피 내리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나선다. 편견 없는 사치에는 그에게 커피 드립을 허락하고, 그는 '코피 루왁'이라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외며 커피 한 잔을 완성한다. 어딘가 사이비(?)의 향기가 나지만 그가 건네는 커피를 마셔 본 사치에의 눈은 반짝 커진다.
커피는 다른 사람이 타준 게 더 맛있는 법이죠.
남자는 자신 있게 말한다. 과연 그 엉뚱한 주문 탓일까. 남자의 말대로 낯선 타국에서 남이 직접 타준 커피를 처음 마셨기 때문이었을까. 진실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남자의 대사에 공감이 가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맞다. 커피는 다른 사람이 타준 것만 한 것이 없다. 그것도 숙련된 누군가가 운영하는 카페의 커피라면.
내가 카페에 가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를 다시 발견한 기분이었다.
영화를 본 다음 날, 나는 당장 다른 사람이 타준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가고 싶어졌다. 이왕이면 아주 맛있는 커피가 있는 곳.
애석하게도 당장 생각나는 커피 맛집 카페는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곳이 됐다. 넉넉하지 못한 자취 생활 중 좁은 집이 답답해 낡은 배낭 하나만 메고 찾아간 카페였다. 커피 가격조차 사치 같아 카페에 자주 가지 못한 때였지만, 가끔이라도 그곳에 찾아가 은은하게 풍겨오는 원두향을 맡고 있으면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항상 모든 카페 내 손님들에게 오늘의 커피 시음 서비스를 해주시는 사장님 덕분에 매번 1+1의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끝내주게 향이 좋은.
그때의 보너스 커피를 생각하자니 다시 카모메 식당으로 돌아가게 된다. 식당을 운영하는 사치에에게는 또 한 명의 특별한 손님이 있었다. 바로 매일 공짜 커피를 마시러 오는 핀란드 청년이었다. 그는 개업한 식당의 첫 손님이라는 특혜로 공짜 커피를 마음껏 누린다. 나 역시 카페 사장님께 오늘의 커피를 얻어마실 때면 좋으면서도 어딘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받은 커피를 남김없이 다 마시곤 했었다. (그러다 잠을 설치기도 하고) 반면 당연한 듯이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 그 청년을 보니 재밌기도 하고 그 당당한 엉뚱함이 신기하기도 했다. 사실 혈혈단신으로 핀란드에 온 사치에에게도 손님 하나 없이 시작하는 가게에 누군가의 온기가 필요하기도 했을지 모른다.
당시 카페 사장님은 어떤 의미로 오늘의 커피를 서비스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카페에 더 머물러 있어도 눈치가 보이지 않았고 집에서 보다 글도 더 많이 쓸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자취생활을 끝낸 이후에도 문득 생각이 나서 그곳을 다시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제는 사장님이 직접 로스팅한 원두 한 봉지도 살 수 있을 만큼 조금 여유가 생겼지만 기대하고 들어선 카페 안은 사장님도 인테리어도 바뀐 듯 낯선 느낌이었다. 이제 다시는 그곳을 갈 수 없다니. 어딘가 먹먹한 기분이 들었지만 인연이 거기까지인 걸 어쩌랴. 몇 년 전, 가장 친한 친구와의 영원한 이별을 겪은 이후, 더는 인연에 연연하고 싶지 않아졌다. 너무 사랑하면 안된다. 그게 사람이든, 장소이든. 그래도 또 뭔가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겠지만.
또 다시 다른 사람이 타준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간다. 거기서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오늘을 살아본다. 어딘가에서 또다시 만날 지 모를 행운의 카페를 여전히 기대하면서.
에세이 속에 나온 어느 카페처럼,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작은 책을 만들었습니다.
아래 링크에서 전자책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모퉁이에 있는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전자책] 모퉁이 빵집 - 예스24 (ye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