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첩산문
라이킷 24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머물다

by 김영주 Mar 18. 2025

| 얼마 전 프랑스 인상파 화가 이자벨 드 가네의 전시를 보고 왔다. 그림은 주로 꽃과 정원, 풍경 등을 다루고 있었는데, 햇살 좋은 야외에서 가벼운 밀짚모자 하나만 쓰고 풍경을 캔버스에 담는 그녀의 사진을 보며 자유로움을 느꼈다. 계절과 빛에 따라 그림 속 자연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지만, 작가만의 시각은 일관적이고 굳건했다. 자연 속에 머무르며 끊임없는 관찰과 작업을 반복했을 과정에 경이를 느꼈다.


| 내게는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일이 늘 쉽지 않았다. 20대에는 작가라는 꿈이 생기면서 다니던 회사에서 이직했고, 고향을 떠나오면서부터는 월세방도 자주 옮겨야만 했다. 작업을 위해 여러 카페와 도서관을 오가야 했다. 어느 곳에 있어도 내 자리로 느껴지지 않아 방황했고, 확신이 없어 늘 맴돌았다. 그러다 비로소 내 방이 생겼고, 이제는 책상 앞에 가능한 한 오래도록 머무르려고 한다.


| 예전에는 머무르지 않고 돌아다녀야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더 많이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산문집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의 일상이 빈약하게 느껴지더라도 일상을 탓하지는 마세요.' 반복되는 일상에서 머무르며 지켜볼 줄 알아야 한다. 머무르며 생각할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어야 한다.


| 봄이 다 온 줄 알았는데 간 밤에 눈이 내렸다고 한다. 바닥은 질척이고, 바람은 다시 차가워졌다. 다행히 아직 이른 아침이고 따뜻한 내 방 책상 앞에서 글을 쓸 시간이 남아있다. 머물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 감사하며.

매거진의 이전글 출간 전야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