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지(commons)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정의는 삶에 꼭 필요한 자원으로서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의 가장 익숙한 예로는 자본주의 이전 봉건시대에 농민들이 공유했던 토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공유지는 사람들의 재생산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렇다면 서울과 같은 현대의 대도시에서도 공유지를 찾을 수 있을까?
자율주의 이론가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는 자본주의적 조건 하에서도 공통하기(commoning)는 늘 일어난다고 주장하면서 그 사례로 공장을 든다. 공장이 어떻게 공유지가 될 수 있을까? 그는 공유지가 단순히 우리가 공유하는 자원이 아니라고 하면서 세 가지 구성적 요소를 드는데, 공동 이용되는 자원, 노동의 사회적 협력, 공동체가 그것이다. 공장의 노동자들은 도구와 정보에 접근할 때 서로 상품 교환에 관여할 필요가 없고(자원의 공동 이용), 조립 라인에서 각 노동자의 노동은 전후의 누군가의 행동에 의존하며(사회적 협력), 공장 안에서 작동하는 규칙을 만들고 출입할 사람을 정의한다(공동체의 작동)는 점에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공유지의 작동이 자본의 축적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그는 공장을 ‘비뚤어진’ 공유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재래시장도 하나의 공유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재래시장의 상인들은 각자의 가게에서 자신의 영업에 몰두할 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재래시장은 단순히 물건의 거래만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다. 재래시장은 특정한 거리에서 그곳의 환경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상인들의 노동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데 하나는 자신의 개별적인 영업 활동을 구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의 환경을 집합적으로 창출해내는 일이다. 상인들의 활동을 후자의 의미에서 바라볼 때, 그들은 거리라는 공간 그리고 재래시장이라는 오랜 관습을 공유하며(자원의 공동 이용), 집합적으로 풍경을 구성해내고(사회적 협력), 시장 내에서 공유하는 규칙을 만들거나 공동의 계획을 수립하기도 한다(공동체의 작동).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재래시장 역시 하나의 공유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재래시장이 공유지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시장과 얽혀 있는 다양한 지역 활동의 기반이 유지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문제는 재래시장 역시 ‘비뚤어진’ 공유지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이 늘 도사린다는 점이다. 상인들이 집합적으로 창출해내는 풍경은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지역화되는 상징 자본을 축적하고 그것이 확대될수록 지역화된 부를 노리는 이들과 실제로 생산하는 이들 간의 첨예한 싸움이 벌어진다. 우리가 최근 서울 곳곳에서 접하는 임대인과 임차인의 분쟁은 지역화된 부를 놓고 벌어지는 싸움의 일면이다. 그 싸움은 소위 ‘뜨는’ 지역에서 더욱 자주, 격렬하게 벌어진다. 성수동이 ‘뜨는’ 것이 한편으로 염려스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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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 뚝도시장 소식지에 실었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