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vs 대한민국
우리는 매일 수많은 뉴스와 인물들을 보고 있습니다. 10대에 수십억을 번 학생부터, 내 또래에 삐까번쩍한 자동차를 가진 사람과 상위 0.1%의 연예인을 매일 보게 됩니다. 그 사람들을 구경하고, 팬이 되는 것도 잠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만듭니다. 이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하고, 불만족과 불안을 유발합니다. 이전 시대였으면 마을에서 가장 이쁘다 인정받을 여성도, 지금은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조상들이 볼 수 있는 잘난 사람은 마을의 한두 명이었다면 지금은 매일 전 세계 수백 명의 잘난 사람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대는 공동체와 관례중심의 사회였습니다. 개인의 개성보다는 모두가 하는 방식대로 살았고, 삶의 가치와 방향을 고민할 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모두가 우뚝 선 주인입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와 자유가 강조되면서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덜해졌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검색을 하고, 일면식 없는 성공한(=성공했다고 하는) 타인의 영상을 봅니다. 자연스레 사람 간의 신뢰가 얕아지고, 정서적으로 덜 교감하게 됩니다. 지인들과 연락은 자주 하지만 깊은 얘기는 줄어들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만, 무엇이 답인지 몰라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현대 사회의 풍요는 지속적으로 높은 도파민 분비를 촉진합니다. 우리는 그때그때 즐겁지만, 뇌는 반복적인 자극에 민감해집니다. 도파민 피로는 보상의 강도를 높여야만 쾌락을 느낄 수 있게 만듭니다. 다만 반복적인 쾌락은 뇌가 그것에 적응하게 만들고, 점점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일시적인 행복감을 줄 뿐, 장기적인 만족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전에는 없던 일입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마케팅의 홍수에 살아갑니다. 우리가 더 홀려야 그들이 돈을 벌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낮은 변화와 자극의 옛 시절은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갔을 것입니다. 밤을 기다려 겨우 별자리를 봐야 하고, 냇가에 가야만 송사리를 보았을 겁니다. 우리처럼 침대에 누워 세계에서 제일 큰 물고기와, 심해의 물고기를 볼 수 없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큰 물고기라도, 그들에겐 너무 놀라운 행운이었을 겁니다.
물질적 풍요는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선택의 폭을 넓혀줬지만, 이는 오히려 뇌의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듭니다. 무엇을 하나 구매하고, 사 먹을 때마저도 수많은 옵션 속에서 헤엄치며, 후회와 선택을 반복합니다. 무엇하나 비교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이게 행복이라면 행복이지만 번거로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 시절에는 선택이라고 할 것이 없었습니다. 계절에 맞게 제철음식을 먹고, 어제 입던 옷을 오늘도 입었을 것입니다. 사냥방식, 농경방식도 누구에게나 다를 것이 없어 선택하거나 도전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따로 시도할 게 없으니 후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나의 탓입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하는 철학부터 나의 성공과 실패는 오로지 나의 능력 때문이라는 능력주의와,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가 판치고 있습니다. 윤리적으로 살아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도,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쓸모없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좌절감, 또 지금 이 삶을 왜 영위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혼란이 가득합니다.
반면 과거의 조상들이 마음 편히 살았다고 한다면 필시 어딘가 믿을 곳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것을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겠지만, 사실 한 개인의 삶으로서는 매우 부러운 것입니다. 본인이 이 신분으로 태어난 것도, 자식이 아프고 건강한 것도, 성공과 실패도 다 하늘과 조상의 뜻이었습니다. 내가 가난하되 착하게만 살면 복을 받을 거라는 믿음과, 죽고 나면 다시 태어난다는 신앙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번생 조금 안 됐어도 내세를 기대했습니다. 적어도 본인을 크게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