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9.
아침 일곱 시, 오늘도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기상나팔 소리에 분대원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지만, 나는 마지막 불침번을 하였기 때문에 한 시간 전에 일어나 매우 상쾌한 기분으로 나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역시 이 시끄러운 소리에는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 뒤에 다시 드러누워서 추었던 지렁이 춤도.
간단하게 실내에서 아침 점호를 하고, 식판에 식비닐을 씌우고 밥을 기다리는데, 벽에 붙어있던 식단표를 본 어떤 분대원이 오늘은 불고기버거가 나오는 날이란다. 어머 이게 바로 그 전설 속의 군대리아인가...! 어디서 듣던 이야기에 따르면, 보통 훈련소 입소 초기에는 바뀐 생활환경과 음식으로 인하여 변비로 고통받는 장병들이 많은데, 군대리아를 섭취하면 설사를 유발함으로써 그 문제를 통쾌하게 해결해준다고 한다. 나도 지금까지 입소 이후로는 화장실에 큰 것을 보러 간 적이 없었는데, 내 생각에는 평소에 먹던 것에 비하여 부실한 식단 덕분에 워낙 먹은 것이 없어서(...) 그렇지 않나 싶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다른 많은 분대원들도 처음에는 변의가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오늘 아침은 그동안의 군대리아 가설을 입증할 수 있는 최소 16명의 인체실험을 목격하게 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오늘 아침으로 받은 것은 햄버거 빵, 불고기맛 패티 한장, 한 포카락 정도의 샐러드(서브웨이 한 스쿱도 아니 된다), 씨리얼, 우유였다. 내가 알고 있던 군대리아 구성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는데, 우유를 제외하면 이 메뉴에서 설사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은 재료에 세균이 가득하여 식중독을 일으키는 방법밖에 없어 보였다. 의구심을 안고 셀프로 조립하여 먹은 불고기버거는 맛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수분기가 거의 전멸하여 타는 목마름을 선사했고, 그것을 넘기려 우유를 마시니 씨리얼에 부어먹을 우유가 없었다. 그래서 씨리얼은 디저트 과자라 생각하고 냠냠 씹어 먹었다. 아, 그리고 역사적인 인체실험은 최소한 나에게서는 가설을 부정하는 데이터를 얻었다.
잔반을 처리하고 세면과 면도를 하고(군인은 꼭 면도를 해야 한다. 안 하면 혼난다) 다시 생활관에 돌아와서, 4번 친구에게 어제 다시 한 반깁스가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발 뒤꿈치 쪽에 쿠션이 없어서 불편하다고 하여, 다시 붕대를 풀고 양말을 반깁스 뒤꿈치 쪽에 댄 이후 솜과 붕대로 다시 반깁스를 해 주니 훨씬 편하다고 나에게 따봉을 주었다. 역시, 높은 고객만족도는 성실한 A/S에 따라오는 것이다. 서비스비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오전에는 생활관 내에서 다시금 제식 연습을 실시했다. 제식이 모든 것의 기본이지만, 항상 그렇듯이 기본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16명이서 똑같은 박자로 움직임을 맞추는 게 참 쉽지 않았다. 좌향좌, 우향우는 그래도 쉬운데 뒤로 돌아는 한 번에 돌기가 참 어렵다. 어렸을 때도 그랬었는데, 난 몸 쓰는 일은 역시 적성에는 맞지 않나 보다.
열두 시가 되면, 어김없이 점심시간이 찾아온다. 아침과 같이 식사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데, 우리 분대가 이번에도 마지막이었다. 이번에도 국이 많지 않았지만, 그 대신 돼지불고기를 더 많이 받았다. 이곳의 급식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을 고르자면 고기반찬은 대부분의 장병들이 호불호가 없게끔 잘 만든다는 것이다. 퇴소할 때까지, 나를 포함해서 고기반찬을 남기는 장병들은 별로 보지 못했다.
오후에는 밖에 나가 운동장에서 제식훈련을 실시했다. 입소한 이후 격리 중이라 다들 계속 생활관에만 갇혀 있고 아직 서로 친하지도 않아서 뻘쭘한 시간을 보내다가 밖에 나가게 되니, 분대원들의 표정이 한층 밝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엔 소대장님 혹은 분대장님들의 지시에 따라 주로 기준에 맞추어 정렬하기, 걷기(바른 걸음, 큰 걸음), 좌우로 90도 돌아서 걷기(줄줄이 좌로 가, 줄줄이 우로 가) 등을 위주로 훈련했다. 오랜만에 밖에 나와 보니, 날씨도 선선하고 하늘도 맑아서 상쾌했다. 훈련소 주변에는 높은 건물이 없어서 하늘이 더 넓어 보여 가슴이 트이는 듯했다.
한 차례 휴식 이후에는 국군도수체조를 배웠는데, 어렸을 때 배운 국민체조와 조금 비슷했지만 동작이 조금 더 복잡했고 팔다리를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구성이 많았다. 전체 길이도 조금 더 길고 복잡해서 외우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앞으로 격리가 해제되면 매일 아침 점호 때 이 체조를 한다고 들었다.
이렇게 바깥공기를 쐬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다시 저녁시간이 되었다. 이번에도 우리 분대가 마지막이었는데, 이번엔 아예 국이 없었다...... 그 대신 제육볶음을 많이 받아서 나는 나름 만족하면서 먹었다. 누가 제육볶음이 맛이 없어지면 나이가 든 거라는데, 나는 아직 젊은가 보다.
이후에 또 순서대로 샤워를 하고(+다시 4번 친구 붕대 감기), 취침 전까지 개인정비 시간이 주어졌다. 보통 일과시간(기상 이후 저녁 먹기 전까지)에는 침상에 누워있는 것이 불가능한데, 저녁시간 이후에는 저녁점호와 취침 전까지 좀 더 자유롭게, 누워서 쉬거나 노는 것이 허용된다. 즉 개인정비 시간은 친목을 다지기 매우 좋은 때이다.
오늘도 어제처럼 각자 어색하게 눈치를 보다가, 어떤 분대원이 마피아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다들 심심했는지 오케이 해서, 16명이서 마피아 게임을 하게 되었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각자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는데, 역시나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고, 생각보다 각 분대원들의 소개를 들었을 때 사회에서 하던 일들이 다양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친구들 말로는 훈련소엔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온다고 했는데, 그것이 정말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의사라고 밝혔을 때, 분대원들이 자기들이 마피아가 되면 내가 실제로 의사니까 게임에서도 날 먼저 죽일 거라고...... 했다. 게임을 그렇게 하다니 치사한 녀석들.
첫 게임을 시작했을 때, 다행히 마피아 게임 사회자는 그 의견에 동참하지 않아서, 나에게 의사 대신 경찰이라는 직업을 주었다. 나는 어차피 마피아 놈들이 처음부터 날 죽이려 할 것 같아, 첫날 낮에 각자 소개를 할 때부터 경찰이라고 선언했다. 이후에 밤마다 난 마피아를 열심히 찾았고, 들키지 않게 잘 숨어있던 의사선생님이 밤마다 날 잘 살려줘서 첫 게임은 무난하게 시민 측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첫날 낮에 각자 자기소개를 할 때 어떤 친구가 "전 야동배우입니다."라고 소개를 해서 그 친구는 퇴소할 때까지 그 별명으로 불렸다.
이후 두 번째 게임에서는 내가 사회자를 맡아서 나름 들키지 않게 마피아를 잘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경찰로 고른 친구가 어마어마한 육감으로 마피아만 계속 찍어서 게임이 굉장히 빨리 끝나고 있던 중에 갑자기 저녁점호를 한다는 방송이 나와서 게임이 중단되었다. 이렇게 끝나서 아쉬웠지만,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편해져서 점호 후에 편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오늘은 내가 불침번이 아니어서 더욱 그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