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1.
주말이 지나고 다시 월요일이 왔다. 평소라면 핸드폰 알람소리를 듣고 출근하기 싫어 온몸을 비틀대다가 일어났겠지만, 훈련소에서는 역시 아침 여섯 시에 울리는 기상나팔소리에 번쩍 눈이 트이는 것이 제맛이었다. 오전 세시부터 네시까지 불침번을 서서 비몽사몽 한 와중에 주변에서 들리는 욕지거리 비슷한 추임새가 더해져 아주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오늘도 아침을 먹고, 세면시간에 머리를 감는데 뭔가 머리가 허전한 이 느낌, 익숙하진 않지만 편한 느낌이었다. 예전에 TV에서 삭발을 하거나 대머리인 사람들은 세수와 머리감기를 한 번에 할 수 있어 편하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내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오전에는 먼저 신체검사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소변검사와 가슴 x-ray 촬영만 하는 것이었다. 현역이라면 혈압재고 혈액검사도 하고 여러 가지가 더 있었겠지만...... 우린 보충역이니까. 분대원들이 나에게 소변검사 스틱에 소변을 묻히니 색이 이상하게 변했다고 괜찮은 거냐고 물어봤는데, 나도 모른다고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몇 년 전에는 그것도 외웠던 것 같은데, 역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니까.
생활관으로 돌아와서, 남은 오전 시간에는 정신전력 교육 예습을 했다. 정신전력이라는 용어는 훈련소에서 처음 들어보았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그 뜻은 이러하였다. 군의 전투력은 크게 유형전력과 무형전력으로 나눌 수 있고, 정신전력은 무형전력의 한 요소로 그 정의는 장병들이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하고, 엄정한 군기, 충천된 사기, 공고화된 단결을 통해 군인에게 부여된 임무를 책임지고 완수할 수 있는 조직화된 전투역량 (국방부, 2019)이라고 한다.
오전의 이 시간은 정신전력을 함양하기 위한 기초 과정으로, 교재를 읽어보고 각 챕터 뒤에 있는 교육 전 사전 질문에 대한 답을 교재에 쓰는, 능동적 학습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우리들은 능동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않아 답을 쓰는데 머뭇거림이 있었고, 특히나 대부분의 교재에 이미 지난 기수의 사람들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답을 적어 놓아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진퇴양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교육관님이 방송으로 이미 누군가 답을 적어놓았더라도 훈련병들은 남은 곳이나 자투리 공간을 활용하여 답을 적을 수 있다는 점을 친절히 알려주셔서, 우리는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피동적으로 과제를 수행했다.
점심 메뉴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훈련소 생활을 기록한 수첩에 '나만 국에 건더기 없어...'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아하니 약간 서러웠나 보다.
밥을 먹고 나른한 오후 시간엔 아까 했던 예습을 이어서 본격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아직 우리는 생활관 내 격리 중이므로 방송을 통해 진행하였는데, 입영심사대 건물에는 TV가 없어서 모든 방송이 열악한 마이크를 통해 교육관님의 육성으로 진행되었다. 배는 찼고 따뜻한 날에 책상을 펴고 앉아있으려니...... 잠이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교육 내용은 졸렸던 탓에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주로 국가와 국방이 중요한 이유, 우리나라 군사력의 규모와 북한군과의 비교, 국방을 위한 국가와 개인차원에서의 가치관 등의 내용이었다.
그렇게 잠결의 시간을 보내던 중, 우리가 반쯤 혼이 나가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보신 교육관님이 갑자기 지금 시간부터는 분대별 과제를 수행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하셨다. 그 과제는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각 분대마다 두 개의 팀으로 나누어 각각 전지에다가 사인펜과 색연필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표현하여 보는 것이었다. 과제를 시작하자 우리 분대원들은 마치 학교에서 조별과제를 수행할 때처럼 서로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방송에서 각 소대별로 평가하여 1등을 한 분대에게는 인센티브(PX이용)가 있다는 말씀을 듣고 갑자기 분위기가 불타올랐다. 한창 많이 먹을 나이의 친구들이 부실한 훈련소 식사를 먹고, 격리 중이라 부식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태로 굶주려 있다가 PX라는 말을 들으니 다들 굉장히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아이디어를 마구 내놓기 시작했다. 사공이 너무 많아 배가 산을 넘어 우주로 향하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정해진 시간 내에 그림과 글을 써서 완성시켰고, 우리 딴에는 결과가 만족스러웠다.
과제 평가는 복도에다가 각 분대별로 결과물을 붙여놓고, 분대장님들이 돌아다니며 합의하에 1등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우리 분대원들은 누구나 다 우리 분대가 1등을 할 것이라며 기대감에 어쩔 줄 몰랐지만, 결과는 꽝이었다. 아쉬움을 삼키고 다른 분대에는 미술을 하던 친구가 있었나 보다 싶었는데, 나중에 불침번을 서면서 다른 분대의 그림을 보니 오십보백보였다. 우리도 태극기 같은 걸 좀 그려 넣을걸.
이후에는 다시 방송을 통해 육성으로 진행되는 자살예방교육-과제에 온 기력을 쏟았더니 다시 졸렸다-을 짧게 들었는데, 수첩에는 이 말만 쓰여 있다. '우리 같이 해결방법을 찾아볼까?'
그리고 저녁식사, 샤워를 진행하고 이후 저녁점호 전까지 자율적 선행학습으로 방독면착용을 실습했다. 각자 관물대에 있던 연식이 좀 되어 보이는 방독면가방을 열어보니, 우리랑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K-1 방독면이 "만나서 반가워, 먼지 속에 있다가 오랜만에 바깥공기를 쐬는구나!"하고 환영인사를 건넸다. 이대로 방독면을 바로 쓰면 샤워 후 뽀송해진 피부가 다시 더러워질 것 같아, 물티슈로 방독면 구석구석까지 잘 닦고 실습을 진행했다. 방독면에서는 마치 학교 체육관 창고에 오래 들어가 있던 타이어 고무 같은 냄새가 났는데, 분대원 중 어떤 친구는 이 냄새가 좋다고 했다. 역시 체육인 분대다워.
방송 공지사항으로 곧 있을 실제 화생방 훈련 시에는 이 방독면을 몇 초 안에 착용하는 것을 시험 보고, 실제로 방독면을 착용하고 건물 안에 들어가 실습용 CS탄을 태워 잘 밀폐가 되는지 본다고 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면 방독면을 빨리 잘 쓸 수 있나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분대장님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방독면 뒤 끈 조절법, 빨리 착용하기 위한 사자머리 모양 만들기, 밀폐 확인하기 등 방법을 직접 오셔서 알려주셨다. 역시 숙달된 조교의 시범은 달랐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저녁점호 후 잠들 시간이 되었다. 자리에 누워 보니 오늘은 빡빡이의 복수를 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훈련소에서도 주말보단 주중이 바쁘구나. 그리고 훈련소는 역시 훈련병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구나. 오늘밤에는 불침번이 없지만 내일밤엔 또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