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그 뚝배기를 깨지마오

대흥. 연탄콩. 콩나물국밥.

by Gozetto

어린 시절 처음 검은 뚝배기에서 펄펄 끓는 국밥을 먹은 이후 뚝배기는 따뜻한 정(情)의 상징이라 생각했다. 다 먹는 그 순간까지 마지막 한 줌의 열기마저 지켜주는 뚝배기는 식사의 마지막 순간까지 체하지 말라고 걱정해주는 듯하다. 뚝배기는 언제나 푸근하고 따뜻했고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시작한 밈이 매번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이른바 "뚝배기 깬다.". 머리를 부순다는 은어로 2017년 배달을 시켜놓고는 바로 나오지 않고 "누구세요?"하는 손님에게 화가 난 모 배달원의 문자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 분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많고 많은 것 중에 왜 뚝배기와 머리를 바꿨는가? 따뜻한 정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한 분노가 펄펄 끓는 뚝배기라니.

다르게 보면 따뜻하고 포근한 정마저도 의심하고 분노해야 살아남는 사회가 되어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다못해 치밀어오르는 의심과 분노를 해소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해소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하게 돌아가는 사회가 한국 사회일지도 모르겠다. 분노를 해소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먹고 사는 문제가 발목을 붙잡는다. 경쟁은 나날이 치열해져 조금만 늦어도 다른 누군가 기회를 채간다. 주변에 항상 누군지 모를 경쟁자로 가득하니 누군가 정을 표현하면 그 사람은 호구 아님 타짜요, 스스로가 갖는 의심과 분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패이자 칼이다.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당하는 것은 누군가 목숨을 노리고 공격한 것이기에 상대방에게 비슷한 정도로 상처를 입혀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


그래서 뚝배기 깬다는 말이 더 슬프게 들린다. 정 그 자체였던 것이 자신이 호구가 아니라는 걸 드러내는 무기가 된 것이니까. 그래서 그런지 뚝배기에 담긴 국밥을 먹을 때면 흠칫 놀란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모두 부수고 싶고 조금의 손해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자기 욕망만 가득한 그릇. 가운데가 볼록 나온 것이 후덕하고 인심 좋아 보이는 모든 것을 품는 그릇을 스치며 지나간다. 순간 뚝배기가 안고 있는 국밥에 입맛이 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처 풀지 못한 과거가 떠오른다. 사죄를 받지 못해 미웠던 사람. 오해였다는 걸 풀지 못해 억울한 사람. 풀지 못한 과거는 잊고 있던 슬픔과 분노도 함께 끌어 올려 정보다 욕망이 한 가득한 뚝배기를 보게 한다.

번뇌로다 번뇌로다. 다른 이가 당장 피해를 준 것도 머리를 깬 것도 아니건만 지나가는 말 때문에 지나간 과거가 떠오르고 그로 인해 현재의 식사를 망치다니.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콩나물과 부드러운 국물을 만들어주는 수란을 풀은 콩나물국밥. 칼칼한 육수 덕에 속을 풀어주는 콩나물의 시원함이 더 배가 된다. 가끔씩 쫄깃하게 씹히는 오징어는 씹는 맛까지 더해준다. 이보다 슬픔과 분노를 잊기에 좋은 국밥이 없다. 칼칼한 국물로 정신을 다른 곳에 돌려 번뇌를 잊고 콩나물로 칼칼함으로 갈 곳을 잃은 정신을 다시 돌려놓는다. 오징어를 씹으며 번뇌의 잔여물을 하나하나 잊어본다. 마지막 밥 한 숟갈 국물 한 숟갈 놓치지 않고 다 먹자 진정이 된다. 뚝배기를 만지며 밑바닥을 보니 여전히 따뜻한 뚝배기가 차분하게 남아있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던 것은 안전한 쉼터이자 정으로 가득한 뚝배기였다.

좋은 것만 보고 먹고 맡고 느끼며 즐기는 것이 쉽지 않으며 그 순간을 다른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즐기는 것은 더욱 어렵다. 과거에 풀지 못한 일에 묶여 분노하며 사는 것도 당장 다른 누군가에게 받은 분노를 풀기 위해 사는 것도 스스로의 삶에서 수많은 가능성을 파괴하며 사는 것이다. 분노를 풀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분노를 타인에게 쉽게 풀어버리는 사람은 많다. 무조건 분노를 참을 필요는 없지만 그 분노를 아무런 브레이크 없이 표현하고 풀어버리는 것은 오히려 분노에 익숙하게 할 뿐이다. 익숙해진 분노는 주변의 모든 것을 분노로 뒤덮으며 당연하다는 듯 매번 분노로 가득한 삶을 마련한다. 바로 옆에 있는 따뜻한 정마저도 분노로 느껴지는 삶이라면 너무 황폐한 삶이다. 그러니 잠시라도 분노를 가라앉히고 따뜻한 정이 담겨 있을 뚝배기는 내려놓자. 님아, 그 뚝배기를 깨지 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