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마주하며 걷기

광흥창. 오군수제돈까스. 로쓰까스+미니우동.

by Gozetto

서울의 거리는 시간을 마주하는 곳이다. 겉으로 보기엔 어제와 오늘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어느 순간 어제의 거리가 사라지고 오늘의 거리도 바뀌고 있는 곳이 서울이다. 특히나 코로나를 기점으로 거리의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환했던 건물은 빨간 글씨로 임대라고 적혀있거나 임대라고 적혔던 곳에는 어느새 새 가게가 단장을 하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변화하는 풍경을 보며 걷다 보면 화려한 과거가 떠올라 씁쓸하면서도 새로 시작하는 오늘과 미래에 괜한 기대감이 차오르기도 한다. 오늘과 미래에만 기대감이 차오르는 것은 아니다. 변화하는 풍경 속에서 변화 가운데 온전히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어제에서도 기대감이 차오른다. 다가올 오늘과 미래는 어떤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기에 기대가 된다면 온전히 남아 있는 어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생각에 기대가 된다. 서울 거리 이곳저곳을 굳이 걸어 다니는 이유는 시간을 마주하고 싶어서인가 보다.


시간을 마주하며 걷기에 좋은 곳은 대흥역에서 합정역에 사이의 거리이다. 대흥역에서 상수역까지는 아직 개발이 한창이지를 않아서 옛날 골목이 살아있고 상수역에서 합정역까지는 홍대 근처인지라 잠시 안 보던 사이에 풍경이 휙휙 바뀐다. 걸어서 10분 정도 간격인데도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보니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게다가 술집이 거리를 채우고 있는 홍대나 신촌과 달리 숨겨진 맛집이 역 주변 골목에 조용히 숨어 있어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 나는 곳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사랑을 받고 있는 듯 했어도 어느 순간 조용히 사라지는 곳이기도 해서 오랜만에 갔다가 허탈감과 아쉬움으로 마음을 다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도 숨겨진 보물이 많은 곳이라 매번 걸을 때마다 어떤 순간이든 기분이 가장 좋은 곳이기도 하다. '오늘은 이쪽으로 가볼까?'. '오늘은 저쪽으로 도전!'. 혼자서 내키는 대로 걸을 코스를 마음대로 정하며 자유롭게 걷는 맛이 있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파헤치는 탐험가가 된 기분이다.

특히 대흥역에서 광흥창역 사이는 서울임에도 정돈되지 않은 골목들이 많아 탐험하는 기분이 더 크게 든다. 큰 도로 쪽에도 '이런 건물에 이런 곳이 있네?' 하는 경우가 많다. '이 건물 아직도 서있는 게 신기하네.'하는 건물에서 카페는 다반사요 문구점, 정비소와 같은 곳도 있다. 그런 와중에 왜인지 덩그러니 놓여있는, 한옥처럼 생긴 건물이 항상 눈에 띄었다. 기와가 얹어진 작은 벽돌집. 대흥역과 합정역 사이를 2017년부터 시간이 되면 걸어다녔으니 못해도 약 4년을 계속 봐온 셈이다. 그래도 마포구인데 고층 건물이 늘어선 큰 도로 변에 기와가 얹어진 한옥이 외로워 보이면서도 계속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경의선 숲길이 조성된 후 가속화되고 있는 마포구의 개발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식당의 모습은 기분 좋은 이질감을 형성한다. 아직 서울에도 과거가 곳곳에 남아있다는 기분 좋은 이질감 말이다.

단순히 식당의 외관만이 아니라 음식의 가격과 식당의 내부도 어제의 모습이다. 일본에서 생겨난 이래 거의 200년이 넘게 존재한 돈카츠라는 음식은 이제 한국 외식계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음식은 아니다. 지갑보다 무거운 물가의 무게 앞에 돈카츠도 1만원 시대에 접어든지 오래다. 아직 초록색 한 장이 안 되는 곳도 있지만 대체로는 로스카츠가 9000원이면 히레카츠부터는 1만원이다. 7000원 혹은 8000원 하는 돈카츠는 서울에서 찾기 어렵다. 그런 와중에 로스카츠에 미니 우동까지 더한 세트 가격이 9000원이라면 아직 이곳이 2010년대 서울인 것 같다. 가게 내부도 작은 한옥이라는 점을 살려서 크게 주방과 화장실을 제외하면 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잠시 가게에 손님으로 초대 받은 기분이다. 집 근처에서 우동과 모밀을 팔던 작은 일식당처럼 오랜 세월을 버틴 벽지에서는 낡았으되 세월을 견딘 단단함이 느껴진다. 새 것 같은 느낌 대신 오래 되었으되 깨끗하고 정갈한 가구와 식기도 학창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추운 겨울철에 춥다고 경거망동하는 것이 아니라 차분한 분위기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식당은 맛에서도 외관과 같다. 고소하고 기름진 맛에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스펙트럼 어딘가를 맴도는 프리미엄 돼지고기가 아니다. 육질은 살짝 부서지는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가운데 적당히 고소한 돈카츠. 맛에서 장점과 단점을 찾는 것보다 그저 어떤 맛인지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즐길 수 있는 식당이다. 집 근처에 오래된 일식당이 있다면 이런 곳이지 않을까? 적당한 가격에 편안하고 안락한 분위기 속에서 판단하는 것 없이 맛을 즐길 수 있는 식당. 감성조차도 돈으로 환산되는 요즘의 시기에 꾸밈없는 외관과 그 외관을 닮은 분위기와 맛이 모두 일치하는 식당을 발견하기란 참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서울 거리를 걷는 일은 힘들다 해도 항상 보람이 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시간을 만날 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최근 들어 '나이가 들고서도 서울의 이곳저곳을 걷는 일이 가능할까?'라는 생각 자주 든다. 나이는 먹어가지 그럴수록 책임은 따라오지. 홀로 서야 하는 순간은 매순간 다가오는데 그럴 때마다 '홀로 서는 것을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홀로 섰을 때 서울 근처에서 서울을 걸어다닐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겹친다. 그러다 보니 서울에서 시간을 마주하며 걷게 되는 날은 참 소중하다. 언제 걷는 일이 불가능하게 될 지 모르는데 언제고 지나갈 때 어떻게 서울의 시간이 지났는지를 추억하기 위해 서울의 시간을 눈에 담아두는 것은 행복하다. 누군가에게는 회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걸으면서 보게 되는 풍경을 기억한다면 서울에서 살 수 없게 되더라도 기억하고 있는 서울의 시간을 통해 서울에서 잠시 살아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시간을 마주하며 걸을 수 있는 서울. 참 걷는 맛이 나는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