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 CGV. 더 폴 - 디렉터스 컷.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모든 떨어지는 이들에게 바치는 생의 의지(3.5)
연말연초가 되면 글을 쓰는 것이 귀찮아진다. 이유는 모른다. 몸이 자동적으로 굼떠지는 것 같다. 아마도 나이를 한 번 더 먹는다는 것에서 알게 모르게 육체와 정신 모두 타격을 받나 보다. 바로 전에 쓴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단상에서도 짤막하게나마 글 쓰는 것에 질리고 힘들다는 토로를 했는데 똑같은 시작이라니... 글 쓰는 것을 유일한 장점이자 장기라고 하는 사람치고는 굉장히 우울한 시작이자 성의 없는 시작이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더 폴 - 디렉터스 컷> 단상을 쓰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재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제목부터 낙하, 떨어짐, 종말, 끝 등을 떠오르게 하는 <더 폴 - 디렉터스 컷>(이하, <더 폴>)은 제목의 다른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 원제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다. 작년(매년 느끼지만 이맘 때쯤 쓰는 작년은 참 어색하다) 크리스마스 시기에 4K 리마스터링으로 감독판이 재개봉하였는데 마케팅 문구 중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글로벌 팬덤이 부활시킨 미친 걸작"
2006년 작품이며 4K 리마스터링으로 재개봉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적절한 문구이다. 특정 주제에 대한 혹은 광범위한 주제에 대한 플랫폼에서 광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요즘과 비교했을 때 <더 폴>이란 영화가 한국에서 잘 알려졌을 것이라 생각하긴 어렵다. 특히나 아직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자리잡기 이전이며 씨네필이라는 이들이 인터넷에서 서로 알음알음 하며 제한적으로 정보를 교환할 정도로 영화에 대한 인식이 대중적으로든 마니아적으로든 아직 얕은 시기에 이 영화가 한국에서 흥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2008년에 한 번 더 개봉한 바 있는데 그 때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시네필들 사이에서 걸작 영화를 언급할 때 많이 언급되는 영화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닌 듯하다. 필자도 이 영화의 제목을 처음 들어본 것이 코로나 시기였다. 나름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영화 귀동냥을 했고 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더 폴>이란 영화를 입에 언급한 적은 없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이 영화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마니아적인, 즉 마니아 중에서도 본 사람은 극히 적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말이다.
그런 마니아적 영화에 대해 글로벌 팬덤이 부활시킨 미친 걸작이라 붙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영화에 대한 글로벌 팬덤이 움직인 것일까? 아마 글로벌 팬덤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지금이라면 숨어 있는 글로벌 팬덤이 움직일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팬덤이 더 넓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한 것일게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은 왜 지금 이 영화를 재개봉하기로 판단했느냐로 바뀌게 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면 제목의 의미와 현 시기의 종말감을 연결할 수 있을 듯하다. <룸 넥스트 도어> 단상에서도 어느 정도 언급했지만 요즘 시기에 죽음은 개인들에게 먼 이야기인 듯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도 가까운 이야기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들려오는 시대에 죽음은 정말로 죽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계속해서 아른거리는 무언가이다. 그런 우리에게 떨어짐의 이미지는 매혹적이다. 죽음을 향해 떨어지는 듯하지만 동시에 공중의 자유에 몸을 맡기는 듯한 아이러니의 감정. 살고 싶지만 사는 것이 버거운 시대에 죽음에 대한 아이러니의 감정은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여기에 색감을 비롯한 <더 폴>의 장면들, 그러니까 이른바 <더 폴>의 미장셴을 살펴보면 이렇게 자극적인 떨어짐은 없을 것이다. "NO CGI", "총 제작기간 28년", "전 세계 24개국 촬영". <더 폴>의 마케팅 문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른바 수제라 할 수 있을 <더 폴>의 미장셴은 원색에 가까운 화려한 색감, 광대하면서 환상적인 배경과 장소 등이 결합되어 있다. 다르게 말하면 이 영화는 노트북 혹은 핸드폰과 같은 좁디 좁은 스크린에서 보는 것이 아닌 어두컴컴한 극장의 거대한 스크린에서 볼 때 더욱 압도적인 영상미를 자랑한다. 그러한 압도적인 스크린은 어두운 공간의 관객에게 절대적인 것에 가까울 스펙타클을, 그러니까 현실의 자기 존재가 영화로 빨려들어간다는 압도감을 선사한다. 현실에서 영화로 떨어지는 셈이다. 단순히 장면의 요소만 매혹적인 것이 아니다. 추락 사고로 척추를 다친 스턴트맨 '로이(리 페이스 분)'와 떨어져 팔을 다친 소녀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언타루 분)'의 관계도 매혹적이다. 척추를 다쳐 다시는 다리를 쓰지 못해 모든 것을 잃은 로이에게 죽음은 가장 간절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음을 바라는 로이가 죽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원수를 향한 뜨거운 복수의 이야기이다. 죽기 위해 가장 생명력이 날뛰는 이야기를 한다는 아이러니. 나아가 죽는 것 대신 끝내 오디어스 총독을 죽여 복수를 끝마치는 검은 도적과 결국 알렉산드리아에게 계속해서 기억으로 살아 있는 로이라는 결말의 아이러니. 현실에서 영화로 떨어지는 관객은 생명에 도달하는 것이다.
<더 폴>이 재개봉한 것은 그만큼 지금의 시대에 종말감이, 즉 당장 삶을 포기하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는 절망감이 팽배하다는 우울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 듯하다. 하지만 종말감이니 우울감이니 이미 삶에서 특히나 요즘 너무나 익숙한 감각아닌가. 그렇다면 <더 폴>과 같은 영화는 우울감을 익숙하게 느끼는 우리에게 다른 관점을 준다. 낙하라는 시점이 사실은 상승의 시기일지도 모른다고. 혹은 낙하해 도착하는 죽음이 사실 새로운 삶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수많은 스턴트맨들의 프레임과 장면을 보며 로이를 떠올리는 알렉산드리아처럼 이 영화는 우울한 삶의 순간에서 다른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떠오르게 할 영화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