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CGV. 신성한 나무의 씨앗.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거짓된 신성이 조이고 조를 지언정 결코 쓰러지지 않으리라(3.5)
현실과 영화가 교차하는 가운데 둘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역동성이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영화이다. 영화는 '이만(미사그 자레 분)'이 수사판사로 승진하면서 그의 가족이 겪는 삶의 갈등과 이를 해결하는 서사에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이란의 민중 운동 현실과 그 이미지들을 서사 사이사이 삽입한다. 이렇게 삽입된 현실의 이미지들은 영화에 서사라는 틀을 거부하게 하는 현실성을 부여한다. 애초에 이 영화로 감독과 제작진들은 정치적 망명을 택한 후 목숨을 건 탈출 끝에 2024 칸영화제의 초청에 응했으며 당해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현재 이란의 정치적 상황과 그러한 상황이 이란 국민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라는 현실적 요건과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현실적 요건이 밀착됨에 따라 <신성한 나무의 씨앗>의 서사는 단순히 스크린에 재현되는 현실의 그림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어디에선가 분명하게 존재하며 현재도 반복되고 있는 사건이 된다.
이처럼 현실과 스크린 사이 경계가 흐릿한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서 시작과 끝이 이제는 더이상 사람이 살지 않아 죽은 마을이 된 이만의 고향이라는 사실은 다른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영화는 인도에서 신성하게 여겨지는 무화과 나무가 사실은 다른 나무에 기생해 그 나무를 조이고 조르면서 영양분을 다 빨아먹으며 큰다고 말하며 시작한다. 뒤이어 어두운 밤 버려진 자기 고향 마을의 버려진 모스크에서 기도를 하는 이만에게 카메라가 넘어가는데 신성한 나무에 대한 자막 이후 버려진 마을과 모스크를 보여주는 점은 어떤 면에서 굉장히 직설적이다. 특히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이만에게 초록색 빛이 비친다는 것도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일반적으로 악마 혹은 악마적 존재를 형상화할 때 많이 사용되는 초록빛이 알라와 소통할 수 있는 모스크에서 알라에게 기도하는 무슬림 남성에게 비춰진다는 것은 신정국가이자 가부장적 사회인 이란 사회가 어떤 악마적인 무언가를 내재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다르게 말하면 모두가 신성시 하는 것이 다른 나무를 조이고 조르며 영양분을 빨아먹으며 크는 무화과 나무처럼 사실은 악마적인 무언가를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자.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서 말하는 신성한 것은 크게 2가지일 듯하다. 하나는 다른 무언가에 기생해 결국 거대한 나무가 되는 무화과 나무 즉, 이란 사회 그 자체이다. 이란 사회는 국민들 특히 여성들의 자유를 억압하며 이를 알라를 통해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하는 이슬람 종교 중 시아파의 논리로 정당화한다. 이러한 정당화는 사회를 신성하다 여기는 국민들에게 기생하면서 더욱 공고해진다. 다른 신성한 것은 기생당하고 있는 바로 국민들 그 자체이다. 무화과 나무에 대한 자막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화과 나무의 신성함은 기생하고 있는 다른 나무에서 비롯된다. 즉, 신성함은 애초에 다른 나무에 있는 본래적 성질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이만은 표면적으로 종교적·가부장적 사회인 이란의 계층·계급 구조를 유지하는 수사 판사로 승진을 앞뒀다는 점, 모두가 떠나 모래와 먼지로 가득한 자신의 고향을 찾았다는 점에서 이란 사회에 종속된 개인으로 다른 누군가의 신성함을 빨아먹는 악마적 속성을 내재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면에서 더 깊이 파고들면 이만은 스스로 신성을 유지할 수도 없으며 이제는 '악'의 잔재만 남아 새로운 신성한 무언가를 찾지 않는 이상 말라 비틀어져 언제 바스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이란 사회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인 것이다.
이만의 인물성과 관련해서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인물은 엄마인 '나즈메(소헤일라 골레스타니 분)'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란의 종교적·가부장적 사회에 종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부응하는 듯한 인물인 나즈메는 가부장인 이만과 신세대인 딸들 사이 즉, 경계에 있는 인물이다. 딸들인 '레즈반(마흐사 로스타미 분)'과 '사나(세타레 말레키 분)'는 승진을 했음에도 숨겨야 하는 아빠의 직업, 단순히 히잡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받아야 하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그러한 억압과 박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에 가해지는 정부의 폭력 등 모두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반면 이만은 기존 이란 사회의 가치를 수호하고 있으며 가족을 보호하고 먹여 살리고 있다는 사명에 철저히 순종하고 있는 보수적 인물이다. 이러한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나즈메는 딸들에게 평소 행실을 조심할 것, 이란 사회의 보수적 가치관에서 벗어난, 소위 까진 친구들을 사귀지 말 것 등을 종용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 아빠에게 순종할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반대로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의 최루탄에 부상을 입은 레즈반의 친구를 치료해주고 그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나즈메의 행동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빠의 본모습으로부터 딸들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말처럼 그것이 현실과 이상이 부딪히는 이란 사회에서 나즈메가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의심해야 하는 구조이자 여성에게 억압을 가하는 가치관이 공적 가치인 사회에서 나즈메에게 삶은 이따금 튀어나올 듯한 자유에 대한 갈망을 감춰야 살 수 있는 살얼음판이었을 것이다. 나즈메가 단순히 사회에 순응하는 보수적 여성이었다면 심문관의 아내이자 자신의 가족과 교류하는 이웃에게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레즈반의 친구가 끌려간 곳을 물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이란 사회의 관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친구를 사귀고 아버지의 권위에 반기를 드는 딸들의 모습에 변치 않는 신의 이름과 권위를 빌리며 분노하는 아빠에게 세상은 변하고 있고 저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표면적으로 엄마인 나즈메의 성장이자 변화의 서사이면서도 악마적 속성을 내재한 이란 사회에 자신의 신성함을 빨리는 것을 살기 위한 현실적인 방식으로 여기던 여성들이 그러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본래적으로 자신들의 성질인 신성함을 지키기 위해 연대해 새로운 신성한 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선언적 연대 서사이기도 하다.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신성한 나무의 씨앗>을 통해 자신의 모국이 변화하지 않고 계속해서 국민들의 신성함을 빨아먹기만 할 때 혹은 자신들의 신성함을 지키고자 하는 국민들의 연대가 빛을 발할 때 어떻게 될지를 결말에서 보여준다. 나즈메, 레즈반, 사나를 다시 억압해 이란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에 편입하려는 이만은 사나가 겨누는 총에 맞아 죽지 않는다. 이만은 모래와 먼지만 날릴 뿐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자기 고향 마을의 어느 집 지붕에 서서 모녀와 대치하고 있다 사나가 쏜 총알이 지붕에 맞는 순간 무너진 지붕의 모래에 깔려 함몰된 채 죽는다. 이때 그의 손은 모래와 먼지에 묻힌 채 무언가를 갈구하듯 하늘을 향해 마지막까지 뻗어 있다. 감독이 보기에 변화하지 않는다면 이란 사회가 맞이할 최후는 아마 이만과 같을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신성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로지 국민의 신성에 기생해 연명해야 하는 이란 사회는 자신들의 신성을 깨닫고 연대하기 시작한 여성들을 시작으로 새로운 체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에 의해 자신들이 쌓아올린 구조에 함몰되어 무너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