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CGV. 짝패.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멋과 낭만이 지나 도달하는 허탈감, 한 잔 해(3.5)
제작사 외유내강 20주년을 기념해 류승완 감독의 작품들이 상영되고 있다. 이를 기회로 SNS에서 짤로 많이 본 <짝패>(2006)를 보게 되었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작년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볼 수 있었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의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에서 느꼈던 개인적인 기시감이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처음 본 류승완 감독의 작품은 <부당거래>(2010)이고 극장에서 처음 본 것은 <베를린>(2013)이다. <베를린> 이후 <베테랑>(2015), <모가디슈>(2021), <밀수>(2023), <베테랑2>(2024) 등 개봉한 작품 대다수는 극장을 통해서 만났다. 류승완 감독의 작품을 모두 본 것은 아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2010년 전후를 기점으로 B급 혹은 싼마이스러움이라 할 수 있는 면모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빠른 편집을 기반으로 타격감이 느껴지는 액션은 여전하나 액션에 대한 연출적 기반에서 B급 혹은 싼마이스러움이 정돈되어 나타난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듯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짝패>를 보며 느낀 것은 액션의 쾌감을 정돈되고 세련되며 유려한 편집으로 전달하는 최근 감독의 영화와 달리 날 것 그대로이자 예상할 수 없이 이리저리 튀는 연출을 거쳐 전달되는 액션의 쾌감이 강렬하다는 것이다. 아직 정립되지 않은 것 같으나 분명하게 존재하는 자신의 색깔을 맘껏 펼치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액션과 연출을 느낄 수 있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짝패>에는 또 다른 공통점도 있다. 류승완 감독에 대해서 대중은 대중적인 액션오락영화 감독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이 찍고자 하는 영화는 '사회파' 혹은 '철학적' 액션영화가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기시감 역시 든다. 장편 데뷔작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어떤 형제의 불행한 인생을 그리면서 성경 예레미야서의 10장 23절의 구절을 띄운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예레미야서 10장 23절
제시된 구절처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과 이성에 기반해서 스스로 삶의 방향을 정하며 살아가지 못한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고 생각하나 실제로는 자신들보다 더 강한 이들에게 이용당하고 종국에는 폭력에 의해 피를 흘리며 죽어갈 뿐이다. 더 폼나는 인생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들 뒤로 삶을 그저 무심하게 흘러갈 뿐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봤을 때 류승완 감독의 액션은 멋과 폼을 위해서 발악하는 인간의 몸짓처럼 보인다. 컷, 장면, 구도 등이 빠르게 편집되는 가운데 교차하는 인물들의 주먹과 발차기는 관객의 눈을 홀리지만 정작 끝에 가서는 원하는 바를 얻은 이는 아무도 없다. 배가 갈라져 흘러내리는 창자를 부여잡고 쓰러져 있거나 두 눈을 잃고 피를 흘리며 세상을 향해 비명을 지르거나 목이 졸려 두 눈이 돌아간 시체로 누워있을 뿐이다. 액션의 쾌감은 급격하게 허탈감으로 낙하해 묘하게 모순된 감정으로 남는다. 부당한 세상에 대한 분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쾌감의 관성을 끌어당기는 듯한 감정 말이다.
<짝패>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이미지를 반복하면서 마찬가지로 쾌감의 관성을 무력감으로 끌어당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비슷하게 20세기를 넘어 21세기 새롭게 등장한 10대, 그러니까 어린 시절 IMF를 겪었고 맞벌이 부모 사이에서 소외되었으며 강압적인 교육 환경에 대해 분노, 좌절, 저항 등의 모습을 보이는 듯한 불량한 10대들이 사건의 표면적인 원인으로 등장한다. 지역 학생들과 태수, '석환(류승완 분/십대, 김시후 분)'의 액션 신에서 학생들은 단순한 표면적인 원인을 넘어서 거대한 폭력 집단으로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권력 집단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무소불위의 권력 집단 같은 이들은 이후 태수와 석환의 조사에 꼼짝을 못할 뿐만 아니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마찬가지로 언제든 배제할 수 있는 칼받이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는 점에서 <짝패>의 10대들은 사회적 문제이자 변화하는 시대의 표상이며 시대의 피해자이다. 특히 필호의 죄를 고발할 수 있는, 유치장에 갇힌 10대 용의자를 죽이기 위해 필호의 심복이 경찰서를 찾아와 형사들을 모두 죽이고 화형시키는 장면은 공권력조차도 무력화하는 필호의 힘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10대들이 사회로부터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는 거대한 권력에 이용당하다 죽게 되는 피해자임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10대의 이미지에 더해 <짝패>는 이른바 멋과 낭만이라고 하는 것이 자본과 권력 등 세상의 현실이라 하는 요소에 의해 얼마나 쉽게 파괴되는지를 보인다.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진하다 할 수 있을 다섯 친구의 우정은 어린 시절부터 '왕재(안길강 분/십대, 정우 분)'와 '태수(정두홍 분/십대, 온주완 분)'에게 항상 눌려 꼬붕처럼 지냈다 생각하는 '필호(이범수 분/십대, 김동영 분)'의 배신으로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단순히 꼬붕처럼 눌려 지냈다는 비틀린 감정만이 아니라 더 많은 자본과 더 강한 권력을 갖겠다는 필호의 욕망 앞에서 20년 뒤 함께 마시자며 산에 묻은 뱀술의 멋과 낭만은 의미가 없다. 친구의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을 알고자 한 태수와 석환의 액션은 필호의 욕망이라는 진실을 알고 난 뒤에는 정신차리라는 왕재의 주먹처럼 멋과 낭만을 기억하게 하려는 액션으로 나아가다 결국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 파괴의 액션이 된다. 그렇게 파괴의 액션이 끝나고 손가락이 모두 잘린 오른손을 부여잡고 5명의 친구들 중 자신만 살아남은 살육의 현장에서 석환이 내뱉는 욕짓거리는 분노보다 허망함이 묻어나온다. 허망한 욕짓거리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성경 구절과 마찬가지로 영화 후반부에서 액션의 쾌감을 붙잡고 늘어지던 무력감에 불을 붙인다.
개인적인 기시감에 불과하지만 류승완 감독이 액션을 단순한 오락적 요소로만 여기지 않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특히나 개봉하는 영화 중 사회적 이슈를 액션으로 녹여내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그러한 노력이 사회파 혹은 철학적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지 혹은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지는 좀더 탐구할 필요가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류승완 감독이 액션을 사회에 대한 불만, 좌절 등의 억압된 감정을 분출하는 도구로만 본 것이 아니라 인물 그 자체로 승화하려 했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그러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음도 분명해 보인다. 최근 <밀수>, <베테랑2>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 분명히 있었으나 그럼에도 류승완 감독의 다음 행보가 기대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