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필름포럼. 바늘을 든 소녀.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찌르기만 해야 했던 이가 엮을 수 있게 되기까지(3.5)
흑백영화를 볼 때면 묘하게 영화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시각적인 면에서 색이라는 요소가 제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색이 사라진 영화에서 인물의 표정, 행동에 눈은 더 세심하게 쫓아가고 스크린 속 세계의 소리에 귀는 더 곤두세워진다. <바늘을 든 소녀>는 1차 세계대전 즈음 유럽 하층민 여성들의 삶을 관객에게 흑백의 세계로 보여주며 감각을 한층 깨우도록 하는 듯하다. 관람 전 포스터로 본 영화는 여성들의 노동 문제를 다루고 있을 것 같았으나 오히려 그러한 지레짐작에 시원하게 뒤통수를 날리며 <바늘을 든 소녀>는 민감해진 감각에 날카롭고 차가운 이미지들을 찔러 넣는다. 안심하려는 순간마다 찔러 들어오는 시선과 소리로 관객은 다시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 스크린에 집중하게 된다.
흑백영화인 <바늘을 든 소녀>가 더 날카롭고 차갑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1차 세계대전 종전 즈음 여성들의 비참한 삶을 억척스럽게 그려내기 때문만이 아니다. 임신을 모성과 분리한 가운데 임신이라는 사건이 여성들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 날카롭고 차갑게 느껴진다. 종전 즈음 코펜하겐의 방직 공장 여공인 '카롤리네(빅토리아 카르멘 손 분)'에게 임신은 전쟁에 나간 남편이 사망이 아닌 실종인 상황에서 공장주 '예르겐(요아힘 펠스트룹 분)'과 결혼해 안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이다. 그의 어머니로부터 거부당하고 포탄으로 얼굴의 반이 날아간 남편이 살아돌아온 순간 임신은 집세 내기도 빠듯한 삶에서 감당할 수 없는 짐이다. 공중목욕탕에서 자신의 성기 안쪽으로 바늘을 찔러 넣어 낙태를 유도하는 장면은 영화의 제목처럼 카롤리네가 처음 바늘을 든 순간으로 섬뜩함에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해 냉혹하고 참혹한 현실을 체험하게 하는 장면이다.
살기 위해 억척스럽게 공장에서 일을 하건,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낡은 집에서 몸을 팔며 살건, 어떤 행운으로 눈이 맞은 부르주아 남성과 연을 맺건 하층민 여성들의 삶에서 더 나아지는 것은 없다. 남성들은 성욕의 대상이 아니면 그저 지나가는 그 무언가로 볼 뿐 하층민 여성의 삶에 관심이 없으며 같은 생물학적 성별이되 생식 능력은 없을 나이 많은 여성들은 하층민 여성들을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는지 감시해야 하는 대상으로, 굴렸다면 지탄 받아야 할 '꽃뱀'과 같은 대상으로 여길 뿐이다. 전쟁으로 남성이 없어 대부분의 노동을 맡아 실질적으로 사회를 지탱하고 있음에도 하층민 여성들은 언제나 삶에서 잊힌 존재들이다. 그런 하층민 여성들에게 카롤리네와 마찬가지로 임신은 재앙이다. 점점 불러오는 배는 모성이 아니라 불확실하기에 잔인한 미래를 떠오르게 해 공포스럽다. 출산으로 세상에 나와 울어대는 아이는 삶의 파도에 무기력한 자신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휩쓸어버리는 삶의 파도 그 자체이다. 색이 없어 더 암울하고 차가운 스크린에서 억척스럽고 잔인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여성의 삶과 여성의 삶의 복지에는 관심은 없으나 모성은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은 더 암울하고 잔인하게만 느껴진다.
그렇기에 '다그마르(트린 디어홀름 분)'가 카롤리네와 임신한 여성들을 위해 책임질 수 없는 아기들을 입양보내준다는 제안은 너무나 달콤해 보인다. 돌이켜보면 말이 안 되지만, 돈 많은 부자들 중 아이를 갖지 못하는 이들에게 입양을 보내준다는 다그마르의 말은 카롤리네와 함께 삶의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린 관객에게까지 찬란한 구원의 빛이다. 심지어 뒤늦게 입양을 맡긴 자기 아기에 대한 죄책감으로 무작정 찾아온 카롤리네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까지 하니... 색이 없는 스크린에 마치 빛이 비쳐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하지만 <바늘을 든 소녀>는 흑백영화이고 빛이 비춰진다고 해도 흑백영화는 여전히 삭막한 흑백의 세계일 뿐이다. 재판장에서 입양 보낸다는 거짓말로 받은 아기들을 모두 죽인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그것은 여성과 아이 모두에게 구원이었다는 다그마르의 말과 행동은 분명 환하지만 여전히 삭막하기만 하다.
아기를 포기했으나 죄책감인지 모성인지 모를 감정으로 아기를 찾으러 온 카롤리네는 다그마르 보다 선인인가? 입양이라는 말로 여성들을 속이고 받은 아기는 하수도에 던진 다그마르는 용서할 수 없는 악인인가? 영화는 이러한 이분법을 흑백의 세계 속에서 흐릿하게 한다. 대신 전쟁 중 카롤리네와 다그마르의 삶의 궤적을 응시할 뿐이다. 누구도 관찰하지 않은 하층민 여성의 삶을 삭막하고 날카롭기만 한 흑백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들의 삶에 무관심하고 오로지 노동과 모성만 강요하는 사회에게, 그런 사회를 유지하는 것에 일조하고 있을지도 모를 관객에게 아기의 울음인지, 아기를 버린 여성의 비명인지 알 수 없는 하수도 소리처럼 눈과 귀에 바늘을 들이댄다. 영화의 결말에서 카롤리네는 다그마르의 딸인지, 어떤 이유로 살아남은 아이인지 알 수 없는 '에레나(아보 녹스 마틴 분)'를 책임지고자 손을 내민다. 카롤리네의 손에는 바늘은 없지만 앞서 들었던 바늘과 다르게 처음으로 무언가를 자신이 직접 엮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날카롭게 파고들기만 했던 것과 다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엮으려는 듯 파고드는 바늘의 이미지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방관자가 아니라 직접 손을 내밀 기회를 관객에게 주는 영화의 기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