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밀리 단상

광화문. 씨네큐브. 이탈리안 스크린스. 패밀리.

by Gozetto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가족이라는 폭력의 굴레에 칼 끝이 향할 때까지(4.0)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는 보기 어려운 다양한 국가의 다채로운 영화들을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기획전은 독립예술영화관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수입 영화들 중 일반적인 경로로 배급, 상영되는 영화들은 결국 한국영화 시장에서 다수의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기에 배급, 상영된다. 익숙한 배우가 나오건, 유명 감독이 연출을 하건,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 제작되건, 영화제에서 나름 호평을 받았건, 나아가 수상을 했건, 최소한 영화를 보러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는 어느 특정 조건을 달성해야 수입배급사를 거쳐 스크린에 상영될 수 있다. 자연스레 해외영화는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수입된다. 최근에는 이러한 경향성이 조금은 완화되고 있는 듯하며 한국에 수입되는 영화들의 국적이 굉장히 다양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해도 최근 다국적 제작 프로젝트가 활발해진 추세에서 보면 수입 영화는 점점 더 다국적화될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멀티플렉스 체제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 한국영화 시장의 현실이기에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영화를 수입, 배급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독립예술영화관의 기획전은 기존에는 보기 어려운 영화들을 볼 수 있는 장이라는 점에서 항상 기다려지는 이벤트이다.


작년, 광화문에 위치한 씨네큐브에서 열린 "이탈리안 스크린스: 뉴 이탈리안 시네마 인 서울"은 이탈리아어를 쓰는 이탈리아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한 기획전이다. 자본적인 여유든, 개인으로서 여유든, 어느 쪽만 충분했다면 기획전의 모든 영화들을 보고 싶었다. 현실은 시사회를 신청해 간신히 <패밀리(Familia)>(2024) 한 편만 볼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패밀리>는 마음 속 깊이 저 아래에서 기대감을 갖고 본 영화이다. 공교롭게도, 운명의 장난으로, 우연하게도 등 여러 수식어를 덧붙이자면 작년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던 회사에서 배급할 예정인 영화의 스크리너를 봤는데 해당 영화가 <패밀리>와 비슷한 소재의 영화였다. 그리고 영화의 스크리너를 본 날이 시사회에 간 날이었다. 두 영화 모두 폭력적인 아버지를 둔 자식, 그 중에서도 아들이 주인공이었으며 아버지의 폭력으로 생긴 그늘에서 아들이 겪는 영향과 변화를 다루는 서사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패밀리>가 취향에 더 맞았고 나아가 더 좋은 영화라 생각했다. 아들, 즉 서사의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 <패밀리>가 더 윤리적이며 나아가 인간적이라 느껴졌기 때문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탈리아 실존 인물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패밀리>의 '지지(프란체스코 게기 분)'는 모순적이다. 의처증으로 어머니 '리시아(바바라 론치 분)'에게 마초적이면서 강압적인 폭력을 가한 아버지 '프랑코(프란체스코 디 레바)'는 지지에게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 했던 어린 시절, 형 '알렉산드로(마르코 시칼레세 분)'의 품에 안겨 공포에 떨며 지나가길 바라는 밤을 선사하고 부모 모두와 분리되어 시설로 가 살게 한 인물이다. 하지만 너무 어렸기에 그만큼 아버지로서 꼭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존재이기도 하여 그가 있어야 남들과 비슷한 평범한 가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프랑코는 용서해 자신에게 사랑을 주는 아버지여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보호시설에서 살다 어머니, 형과 프랑코가 모르는 곳에서 가족을 이뤄 사는, 청년 지지가 극우주의 극렬단체에 가입해 단체의 장에게 인정받는 행동대원이 되기를 바라는 모습은 자신에게 방향을 가리키며 안정감과 믿음을 주는, 정신적 지주로서 아버지를 갈구하는 면모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같은 단체 소속이자 자신의 곁에서 그가 위험한 행동에 나서지 못하게 말리며 곁에 있어주는 '줄리아(테클라 인솔리아 분)'에 의해 극렬단체에서 테러와 같은 극우적 행동에는 나서기를 주저하고 고민하는 모습은 그가 원하는 것은 안정을 주는 사랑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즉, 지지가 원하는 것은 서로를 보호해주면서도 사랑해주는 가족이다.


이처럼 모순적이기에 지지는 가족들을 쫓아와 다시 옛날처럼 돌아가자 말하며 용서를 구하는 프랑코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다 가족과 프랑코의 만남을 주선해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폭력에 대한 기억으로 어머니는 아버지를 두려워만 하고, 형은 증오하기만 한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폭력에 의해 상처를 갖고 있으나 두 사람은 상처를 치료하기 보다 덮어놓고 잊으려고만 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나서서 가족을 정상화하려 한다. 어떤 점에서 지지는 가장 이상적인 가장으로 보인다. 돌아온 탕부(宕父)를 다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가족을 설득하고 극렬단체를 나와 일을 하며 줄리아와 관계를 유지하려는 모습은 평범한 가족이 되고자 하는,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가장의 모습이다. 조금씩이나마 어머니는 프랑코와 관계를 회복하려 하며 형은 프랑코를 다시 아버지로 여기려고 한다는 점에서 실제로 지지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공하는 듯하다.

출처. 키노라이츠

하지만 그러한 지지의 노력은 권력만 있는 가부장으로서 폭력으로 가족을 분열시킨 프랑코까지 바꾸지 못했으며 결국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가족의 상처를 치료하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기 위해 프랑코를 직접 살해하는 지지는 가부장 신화에 대해 씁쓸한 모순이자 가장 행복한 엔딩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가부장을 아들이 살해하고 그 지위를 세습하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가부장제는 모순되게도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해야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체계를 파괴할 수 있으며 반대로 그렇게 아버지를 살해해야 아들에 의해 가부장제가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지지는 프랑코를 살해했으되 프랑코의 권력을 소유하지 않았다. 나아가 프랑코를 살해함으로써 비로소 가족과 자신의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400번의 구타>(1959)가 떠오르는 듯한, 이따금 달빛과 가로등에 비쳐 보이는 어두운 밤거리 속 어린 지지의 뜀박질은 공포와 무력감 속에서 방 한 켠에 떨고 있던 어린 지지가 미숙하지만 성인이 된 지지에 이르러 비로소 공포와 무력감에서 벗어난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400번의 구타>의 뜀박질이 세계의 폭력에 대한 무력감과 분노를 내재하고 있다면 반대로 <패밀리>의 뜀박질은 위로와 치유를 통한 새로운 시작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서사의 인물은 인공적인 서사의 세계에서 결핍을 겪고 있고 결핍에 고통받으며 벗어나려 몸부림친다. 몸부림은 보통 결핍의 극복으로 이어지나 결핍에 좌절하기도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 서사의 법칙은 너무나 오래되어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관객들은 서사로부터 감정적 위로를 받고 단순히 위로 받는 것을 넘어 삶을 위한 새로운 에너지를 얻거나 서사에서 삶의 중대한 변화를 위한 디딤돌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것이 극복이건 좌절이건 결국 중요한 것은 납득시키는 과정일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과정, 즉 인물의 몸부림에 관객이 감정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납득하고 이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패밀리>의 지지가 겪는 몸부림과 그에 의한 결과는 관객이 감정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납득하고 이입할 수 있는, 즉 대단히 윤리적이며 나아가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서사의 인물이 서사만의 존재가 아니라 현실에도 발을 걸치고 있는 경계의 존재라는 인식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인물에게서 세계에 끌려다니는 수동성 보다 자신을 끌고 다니려는 세계에 저항하는 능동성이 더 강하게 드러나는 가운데 그러한 인물이 정합적으로 극복 혹은 좌절로 나아갈 때 서사의 인물을 경계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르게 말하면 서사에서 인물에게 얼마만큼의 능동성이 부여되어 있으며 능동성을 통해 인물이 세계와 어떻게 갈등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가 적절해야 관객은 납득, 이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인물을 통해서 관객은 현실과 서사의 경계를 잊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