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씨네큐브. 프랑켄슈타인.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속에 성을, 추에 미를 담아 불완전의 아름다움을 그리다(4.0)
작년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영화제가 끝나려고 하나 싶을 정도로 쟁쟁한 게스트들이 영화제를 방문했다. 그 중 생전에 이런 모습을 볼 줄이야 했던 게스트를 꼽아보라면 단연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다. 애교라는 단어와 그 의미가 생소한 해외의 델 토로 감독이 신예은 배우의 제스처를 따라한 그 모습은 정말이지 다시 봐도 조작 영상이 아닌지 의심하고 싶을 정도이다. 귀여운 곰돌이 푸 같은 인상과 다른, 지금껏 본 감독의 영화를 되새겨보면, 심지어 그 해 영화제에서 선보인 영화가 넷플릭스의 등에 올라탄 <프랑켄슈타인>(2025)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기묘함과 괴기스러움이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인, 영화애호가 등을 향한 영화 간접 홍보가 제대로 먹혀들어간 순간은 아니었을까 싶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피노키오>(2022, 이하 <피노키오>) 이후 델 토로 감독이 넷플릭스와 다시 한 번 함께 작업한 <프랑켄슈타인>은 감독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넷플릭스라는 대형 자본을 마음껏 휘두른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향후에도 넷플릭스와 지속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극장 상영을 2, 3순위로 생각하는 OTT 플랫폼의 자본으로 영향력 있는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은 모순적이다. 하지만 반대로 델 토로 감독과 같은 감독이 자본을 끌어와 지속적으로 OTT 플랫폼의 콘텐츠이기 전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제작한다면 영화 제작을 위한 자본이든, 영화 유통, 배급을 위한 자본과 방식이든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시작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가능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한 OTT 플랫폼의 콘텐츠가 아니라 극장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것을 염두한 영화이다.
<프랑켄슈타인> 이전에 본 델 토로 감독의 영화는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2005),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 <피노키오>까지 총 3편이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음울하고 그로테스크한 동화와 같다는 인상이 떠오른다. 정상이라 생각하며 당연하게 여긴 것, 성스럽고 고귀하다 인식되는 것을 전복해 얼마나 그것들이 추한지를 목도하게 한다. 반대로 비정상으로 여겨 피한 것,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것, 뒤들리고 속된 것이 추해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껍질을 뚫고 나오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음을 보인다. 순수하고 아름답게만 여겨지는 동화가 뒤집혀 음울하고 그로테스크하지만 여전히 아름답기에 동화라는 말 외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원작 소설을 델 토로 감독의 색깔로 각색한 <프랑켄슈타인>은 시각적으로 기묘하고 황홀하다.
19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한 <프랑켄슈타인>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오스카 아이작 분)'과 '크리처(제이콥 엘로디 분)'가 각자의 이야기를 선장 '아네르슨(라스 미켈슨 분)'에게 순서대로 전하는 서사 구조를 보인다. 전자는 창조자의 변명과 같고 후자는 창조물의 증거처럼 느껴진다. 즉, 빅터는 자기 삶을 회고하며 자신을 변호하고 있으나 실상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되 축소 혹은 은폐하고 있어 그의 회고는 빅터를 죽음을 정복한다는 도전과 열망으로 가득찬 인간보다 자신의 욕망에 휘둘리다 끝내 자신의 죄마저 숨기려는 비열한으로 밀어버린다. 반면 크리처의 이야기는 창조에 이어 존재 말살이라는 폭력까지 당하고 있음에도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비존재자 그 자체이다. 유일하게 자신을 인정한 '엘리자베스(미아 고스 분 )'와 '눈 먼 노인(데이비드 브래들리 분)'를 제외하면 그는 자신의 존재를 만든 창조자 빅터부터 시작해 모두에게서 뒤틀리고 있어서는 안 될 부정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그를 부당한 탄생에 더불어 불가능한 죽음까지 맞이한, 그럼에도 인간다움을 고민하고 지키려 하는 가련한 존재로 끌어올린다.
이러한 두 서사의 교차로 빅터라는 인간과 크리처라는 창조물 사이에는 인식적 역전이 발생한다. 동시에 인식적 역전은 인간이나 인간다움 혹은 인간성을 잃어버린 듯한 빅터와 반대로 인간다움 혹은 인간성을 갖고 있으나 인간은 아닌 크리처를 통해 인간다움 혹은 인간성은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없음에도 그것을 지키려 할 때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얼마나 성스러워 보이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음울한 고딕풍의 19세기 유럽이라는 배경, 더럽고 냄새가 나는 듯한 도시의 거리, 팔다리가 꺾이거나 날아간 채 죽어 널브러져 있는 그로테스크한 시체까지. 총과 둔기에 맞아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짖이겨지고 찢긴 신체를 들고 일어서는 크리처,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그의 신체가 휘두르는 폭력에 부서지고 갈리는 인간. 델 토로 감독의 잔혹한 세계에서는 일반적, 정상적이라고 생각한 것 혹은 그러한 인식은 마치 없던 것인 마냥 사라지고 그러한 생각과 인식으로 인해 잊고 있거나 상상하지 않은 것들이 시각적으로 부상한다. 즉, 서사에 의한 인식적 역전과 스크린 너머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보지 못한 것들의 시각적 구현은 서로 반응해 관객에게 추(醜)의 성스러운 미(美)라는, 전복과 낙하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역동에 도달하게 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추(醜)는 미(美)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기예르모 감독의 인물들은 어딘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이거나 느껴져 어색한 인간 같다. 그 어색한 인간의 모습은 뒤틀리거나 부러져 있거나 아예 없어서 처음 봤을 때는 극단적인 혐오의 감정이 든다. 하지만 어색한 인간의 모습은 점점 애처로워지면서 혐오의 감정이 든 자기 자신을 자책하게 되고 저 어색한 인간을 더 사랑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저 어색하고 추한 인간의 모습이 우리 자신이며 그 추함이 여전히 추해보이는 면이 있을지라도 점점 아름답게 빛나기 때문이리라.